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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옥 수필] 생각의 여백, 멀리 바라보기

시사앤피플 | 기사입력 2022/11/02 [22:51]

[오경옥 수필] 생각의 여백, 멀리 바라보기

시사앤피플 | 입력 : 2022/11/02 [22:51]

 

▲ 오경옥 시인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이 주는 오묘한 빛깔에 물들고 싶고 그 향기를 눈으로 마음으로 느끼고 싶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편한 사람과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오고 싶은 십일월 둘째 주 월요일이다.

 

오색 물비누 방울처럼 부풀어지는 내 눈빛을 남편은 읽은 것일까. 남편은 관광과 등산을 겸할 수 있는 가까운 모악산이나 다녀오자고 한다. 가진 것은 없으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려고 한다. 사실 십 수 년이 넘게 살아오면서 남편과 오붓하게 여행 한 번 다녀온 적이 없다. 바쁜 직장일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 까닭을 굳이 변명으로 든다면 말이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둘만의 시간, 마음이 먼저 민들레 꽃씨 되어 하늘을 둥둥 날아다닌다. 그래서 자유를 꿈꿀 수 있는 여행이란 길거나 짧은 시간일지라도 언제나 가슴을 들뜨게 하나보다.

 

발길을 떼어놓기가 바쁘게 김제의 드넓은 지평선이 꿈결처럼 다가온다. 오디오에 즐겨듣는 음악을 켜고 창문은 반쯤 열어놓고 시원한 들녘을 가르며 달린다. 사각 콘크리트 안에 늘 모니터와 시름해서인지 몽롱하고 침침한 눈빛, 안개에 쌓인 듯, 목안에 무언가가 얹혀있는 듯, 가슴 어딘가가 먹먹했던 것이 비로소 시원하고 개운하게 뚫린 기분이다.

 

금산사 입구에 들어선다. 마침 개찰 1500주년 기념행사라고 절로부터 이어져 양쪽으로 연등이 걸려있고, 몇 백 년은 되었음직한 도토리나무나 은행나무, 그리고 단풍나무들이 웅장한 면모를 과시하듯 아름다운 빛깔로 가을을 읊조린다. 리듬을 타고 계곡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개울물까지도 <가을의 속삭임>이란 음악을 틀어놓은 것처럼 우리들의 발걸음과 마음까지 맑게 한다.

 

 

재건되어서인지 아니면 주말을 보낸 후여서인지 금산사는 깔끔하고 조용하리만큼 한적하다. 오층석탑과 석연대 그리고 수북히 쌓인 낙엽들을 깨끗이 쓸어놓은 나한전과 미륵전, 선인들의 얼과 정성으로 토닥토닥 다듬어져 있는 석등이나 석종 등, 그 많은 보물들을 둘러보니 이끼 낀 세월에도 선인들의 고아한 향기를 느낄 수 있어 참 좋다.

 

또한 문지방 아래에 정갈하게 벗어놓은 스님의 흰 고무신과 산사에서 느껴지는 특유한 향내음, 그리고 멀리까지 들려오는 목탁소리와 독경 소리가 기독교를 믿는 우리들이지만 마음을 가지런히 빗질하게 한다.

 

금산사를 돌아 우리들은 등산로를 향한다. 부도전을 지나 오솔길로 접어들었을 때서야 살아가기에 바쁘다는 이유로 미루어 두었던 남편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하고 싶었지만 삶에 의해 밀려나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이 입가에서 머뭇거린다.

 

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진 가족들을 위한 흔적이 웃을 때마다 남편의 빗살진 눈가에서 입가의 주름으로 괄호처럼 모아졌다 풀어진다. “?” 라고 눈빛을 부풀리는 짧고도 나직한 그의 물음 속에서 추억 속에 다정했던 모습을 스치듯 떠올리게 한다.

 

일찍 결혼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늘 챙겨주고 아껴주려 했던 따뜻한 마음, 바쁘고 힘들어 피곤을 이유로 잠시 미루어 두곤 해서 자주 눈에 들어오는 허물까지도 남편은 탓하거나 나무람 없이 농담반 진담반 넌지시 웃으며 나의 할 일을 대신 해주곤 했다. 결혼 전을 포함해서 여유를 가지고 바라보았을 때의 마음의 빛깔이라고 해야 할까.

 

무병장수 한다는 전설이 있는 눌연계곡을 보며 우리는 오솔길을 걷는다. 고명을 얹은 듯 맑은 계곡을 따라 둥둥 떠내려오는 단풍잎들을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본다. 모든 일들을 잊고 열려진 마음으로 길을 걸어서일까. 모든 것들이 곱게 느껴진다. 순간, 그러한 마음의 자세로 살아간다면 삶이 얼마나 탄력 있고 윤택할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물소리 따라 푸석푸석 낙엽을 밟고 걸으니 먼 거리로 물러 서있던 그리움이나 추억 같은 추상명사가 물든 단풍나무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삶이나 생각에서 적당한 여백이나 혹은 멀리 바라보기는 가지마다 아름다운 이파리를 매단 가을나무가 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한다.

평소에 가까운 월명공원도 올라가 보지 못했던 것을 잠시나마 후회하게 한 곳은 모악정에서부터 정상을 향하는 길이다.

 

등산복을 입은 몇 명의 사람들을 빼고는 등산한 사람은 없을 정도로 난코스다. 힘들어하는 내게 남편이 손을 내민다. 의지만 있으면 길은 통한다고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본다. 그러나 조금 전의 그 계곡물이 그리울 정도로 목이 타고 땅에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가다가 아니가면 아니간만 못하다는 고시조 한 수가 떠올라 잠시 앉아 쉬고 싶은 마음을 접게 한다.

 

걸으며 생각해보니 등산하는 일도 우리들의 인생과 조금도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때때로 홀로 길을 걸어볼 필요가 있지만 살다 보면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답답할 때가 얼마나 많던가. 그럴 때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 비 올 때 우산을 받쳐주며 함께 걸어줄 이가 있다는 것은 정말 마음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이나 공기나 나무들처럼 우리는 언제나 늘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너무 가깝고 편해서 그 고마움을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나 이웃 같은 사람들, 그 평범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가슴을 나누지 못하는 먼 곳에 떨어져있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숨이 막힌다. 흘러내리는 더운 땀을 훔쳐주는 미풍처럼 남편의 뒷모습이 미덥다.

 

솔향기를 맡으며 미끄러지듯 밟히는 갈색 송엽과 걸을 때마다 부드럽게 달라붙는 흙의 촉감, 그것은 산행하면서 느껴보는 작은 기쁨이다.

 

비행기 날개처럼 희끗한 송신소가 보이는 것이 정상이 가까워 보인다. 등산의 기쁨은 산정에 올랐을 때 그 절정에 달한다고 한 니체의 말은 정상에 서 보니 실감난다. 뽀얀 산안개를 감싸 안은 산 능선이 햇빛을 받지 않은 부분에 음영을 드리우며 거대한 호랑이라도 한 마리 엎드려 있는 모습처럼 알록달록 웅장한 모습으로 골을 이루며 포효하고 있다.

 

산 아래를 훑고 올라오는 안개처럼 가슴 밑바닥에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피어오른다. 생활에 습한 기류들이 고여서 가슴에 둔탁한 울림으로 출렁일 것만 같은 것들, 사우나라도 하고 난 듯 흠씬 땀을 흘리고 나니 가볍고 개운함마저 든다.

 

내려가는 길은 앞발에 힘이 가해지면서 미끄러지기는 했어도 다소 쉬웠다. 내려왔던 길을 따라 조금 전에 올라갔던 산정을 바라보니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았던 신비함과는 다르게 자랑스러움까지 든다.

 

오랜만에 다녀온 가을 나들이, 한동안 내 삶을 윤택하고 탄력 있게 할 것 같다단풍빛깔처럼 고운 저녁노을을 안고 김제 들녘을 달린다. 집으로 돌아가는 남편의 옆모습이 노곤해 보인다.

 

* 오경옥 시인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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