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이민영 기자 = 지난 8일 경기도 연천 출신 국악 엔터테이너 임진숙 씨(60)를 만났다. 평범한 그의 삶은 여느 한 시민의 삶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의 삶에 담긴 스토리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시간이고 또한 극복해야 할 삶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는 환갑을 맞이한 연령에도 꿈 많은 소녀처럼 에너지가 넘쳤다. 우리는 인터뷰 내내 국악에 관한 이야기를 끊이지 않고 이어갔다. 20년 전 그는 “가락 장구의 소리를 듣는 순간 오감에 스며드는 어떤 느낌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우연하게 시내 어디를 지나가는데 경기민요 가락장구의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그 때 장구소리가 너무 좋았어요, 나도 모르게 호기심이 생겨 장구를 배우게 됐습니다”
이것이 그가 국악에 입문하게 된 계기이다. 무엇이든 아무런 생각이 없이 대할 때는 깊은 감흥이 일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을 집중하거나 필이 꽂히게 되면 더 특별하게 느껴지게 되는 법이다.
임 씨의 각별했던 그 당시의 장구소리는 그가 가진 국악에 대한 동경을 관통했다고 보여진다. 이후 그는 장구, 사물놀이, 경기민요, 전통무용 등으로 이어지는 국악 배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젊을 적 프랑스에 가서 미용전문교육을 받고 돌아와 7년 정도 미용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그랬던 지 국악에 대한 잠재적 소질을 하마터면 묻히게 될 뻔 했다.
국악은 다른 음악 장르에 비해 박자 감각이 매우 중요하다. 그 당시 그는 생업에 몰두하다 보니 리듬 감각이 둔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든 노래 소리가 나면 박자부터 맞추는 행동을 취하면서 박자감각 익히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렇게 몇 달을 지내다 보니 그에게 박자 감각이 되살아났다. 임 씨의 이러한 노력은 그가 가진 잠재적 끼를 깨우게 돼 본격 국악분야 엔터테이너로서 출발선에 다다르게 됐다.
임 씨는 열심히 국악을 배우고 나서 수 많은 국악대회에 참가했다. 각급 대회에 참가해 장려상 우수상을 받게 되고, 2014년 남양주풍물대동제에선 대상을 받기도 했다.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된 그는 국악 엔터테이너로써 열정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한 때 그는 이론적으로 뒷받침을 하기 위해 진학을 염두에 두기도 했지만 남편의 사업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그 꿈을 접었다 . 그는 경기도 연천에서 부농의 귀한 딸로 성장했다. 하지만 부친은 남존여비 사상으로 인해 딸인 그에게 큰 배움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어릴 적 크게 배우지 못한 점을 오랫동안 서운하게 생각했었다고 밝혔다.
그는 여자상고를 마치고 취업 후 배움의 욕구가 막혀버린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느라 숫한 고뇌를 해야만 했다. 훗날 국악을 배우면서 그에 대한 대리 만족을 하게 됐는 지 모르지만, 국악을 배우는 게 무척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더 배운다고 남편을 내조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살 수 없게 됐을 거라는 것을 생각해 보니 어쩌면 진학하지 않은 게 더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임진숙 씨는 몇 년 전 초기 암 진단을 받고 치료하면서 삶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정리하게 되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이제 완치가 된 만큼 활동할 수 있을 때 더 보람 있는 일을 찾아 ‘하고 싶은 일’을 하려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 건강을 잘 챙기려 합니다. 수영, 에어로빅, 골프 등을 하면서 지인들과 함께 내가 배운 국악솜씨, 미용솜씨로 노인정 공연, 다문화 신부화장 등 여러 곳에서 재능기부를 하려고 한다”고 포부를 늘어 놓았다.
또한 그는 삼봉사물놀이 총무, 구리문화원 총무 등 수십년 동안 여러 모임의 만년 총무를 하면서 지인들의 손발이 되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 전했다. 임 씨는 남을 위해,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삶의 에너지를 만드는 비결이라 했다.
임진숙 씨는 마무리 발언에서 “이기적인 삶보다는 이타적 삶을 통해, 또는 남을 위해 더 봉사하는 나날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게 되고 그에 따른 즐거움을 발견하게 됐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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