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필자가 미국 휴스턴의 라이스대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 교육부에서 파견된 주휴스턴 총영사관의 교육원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미국의 대학교 설립요건을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한국 대학생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라이스대학교의 법률자문역에게 문의하니, 미국에는 대학교 설립요건이 없다고 한다. 교육원장은 그럴 리가 있느냐고 되 묻는다.
대학교를 만들려면 땅은 최소한 얼마나 있어야 하고, 강의실은 몇 개 있어야 하고, 교수는 몇 명 있어야 된다는 요건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미국에는 그런 게 없다 하니, 그럼 대학교 설립을 위한 승인절차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
다시 알아보니, 미국에는 승인절차가 없다. 그냥 설립하면 된다. 교육원장은 그러면 제대로 된 대학교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한 답은, 학생들은 대학교의 평판에 따라 지원하면 되고, 대학교를 평가하고 인증하는 기관들도 있으니 이를 참고하면 된다는 것이다.
역시 라이스대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 한국정부의 연구사업을 수행한 적이 있다. 연구가 끝날 때 예산지출내역을 영수증 등 증빙서류와 함께 제출하는 절차가 있었다.
학과 비서가 이를 처리하는데만 며칠 걸렸다. 그녀는 앞으로 한국정부의 연구사업은 절대로 받지 말아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미국 대학에서는 이미 받은 연구예산에 대한 지출내역을 제출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증빙을 위해 영수증을 첨부하는 일은 없다. 연구비를 지원받으면 논문이 학술지에 실릴 때 각주에 연구비를 지원한 기관들을 언급하면 그만이다.
미국 대학에서는 교수가 학회참석 등을 위해 출장갈 때 본인에게 주어진 예산이 있으면 그 한도내에서 별도의 절차 없이 그냥 다녀오면 된다. 한국에서는 출장계획서을 작성하여 출장신청을 해서 결재를 받고, 돌아오면 출장보고서를 내야한다.
어느 기관에 가서 누구와 무슨 회의를 했는지 적어내야 한다. 교수의 귀중한 시간이 이런 일에 낭비된다. 비용처리에도 상세한 절차와 규정들이 있다.
학회참가비, 항공료 등은 법인카드로 처리한다. 숙박비, 식사비, 현지교통비 등은 출장지역에 따라, 직급에 따라 정해진 금액을 지급받는다. 사족으로, 대도시의 경우 호텔비가 비싸서 실제 비용은 지급받는 비용보다 더 드는 게 보통이다.
대학에서 불필요한 절차에 인력과 예산이 낭비되는 이유 중 하나는 정부의 행정절차에 따르고 감독을 받기 때문이다. 카이스트는 그래도 행정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편이다.
상대적으로 규제를 덜하는 과학기술부 소관이기 때문이다. 한 때 과학기술부가 교육부가 통합되었던 적이 있다. 이 때 갑자기 불필요한 규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출장갈 때 보충강의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교학부총장을 만나서 카이스트 교수들 중에 출장가면서 보충강의를 하지 않는 교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 왜 보강계획서 제출로 교수들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교육과학기술부 방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보강계획서 제출을 없던 일로 하였다.
교육부 소관의 지역대학교를 파트타임으로 도와주면서 드는 생각은 대학행정의 90퍼센트는 교수들을 신뢰하면 되는 불필요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수들의 연구와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행정요원들이 있지만, 이들의 업무도 대부분 불필요한 절차들을 진행하기 위한 것이다.
교육부의 연구개발(R&D) 지원업무가 상당부분 지방정부로 내려오고 있는 추세다. 지방정부와 지역대학들이 함께 하는 지역혁신사업들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대학행정 뿐만 아니라 지방행정도 효율적으로 변해야 한다. 사전규제보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선진 시스템으로 가야한다.
* 채수찬 경제학자 • 카이스트 교수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시사앤피플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