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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천재 화가 이인성의 장남, 이인성기념사업회 이채원 회장:시사앤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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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천재 화가 이인성의 장남, 이인성기념사업회 이채원 회장

근대 미술의 근원을 밝혀, 세계적인 K-미술을 보여 주고 싶어

이민영 기자 | 기사입력 2023/10/14 [20:28]

[인터뷰] 천재 화가 이인성의 장남, 이인성기념사업회 이채원 회장

근대 미술의 근원을 밝혀, 세계적인 K-미술을 보여 주고 싶어

이민영 기자 | 입력 : 2023/10/14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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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채원 이인성기념사업회 회장    

 

[시사앤피플] 이민영 기자 = 미술을 전공하거나 이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일제 강점기 천재 화가 대구 출신 이인성 선생(1912~1950)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술계 거목으로 존경받는 그의 작품과 정신은 그가 그린 그림 속에 드러나고 있다.

 

지난 14일 인터뷰에서 이채원 이인성기념사업회 회장(1950)우리나라 미술 문화 도입과 근대미술의 역사성이 현대미술의 뿌리내려 만들어진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리고자 이 기념사업회를 시작했다고 했다.

 

이 회장은 부친의 유명세에 밀려 이인성 선생의 장남(외아들)으로 더 알려졌다. 그는 성장과정에서 선친에 대한 이야기를 모친과 친척, 또는 부친의 친구들로부터 많이 들으면서 자랐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대한 안목을 일찍부터 갖게 된 것 같다고 한다.

 

또한, 이 회장은 우리나라 미술 교육의 시대적 상황, 선친의 미술 세계, 그리고 삶과 인생에 대한 얘기를 전언을 통해 많이 들어와 일제 강점기 문화예술계의 분위기나 환경까지도 알게 됐다고 한다.

 

그 시대의 위대한 천재보다는 인재를 발견하는 사람이 더욱 위대하다고 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럼으로써 위대한 인재는 그 사회 시대의 움직임과 지배성을 여일 수 없다는 것이다”(1948.1.5. 자유신문 기고)

 

선친의 이 기고문을 보듯 이 화백은 일제 강점기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정신과 정부의 지배성이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이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창작에 임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기념사업회는 1990년대 들어서 처음엔 임의단체로 만들어져 미술을 사랑하고 조예가 깊은 분들이 힘을 실어 줘 발전하고 있다. 주요 참여 인사를 보면 영화배우 안성기, 이현우 경주이씨 중앙화수회장, 김범일 전 대구시장 등이다.

 

이채원 회장은 많은 미술관이 존재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까지 미술관만 세웠지 제대로 된 평전이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대에 대한 당면과제에 급급한 현실에 빠지고, 우리의 근본 신토불이가 우리 미학에도 있음을 모르고 그냥 서구에서 뚝 떨어진 서양화로 인식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라 했다.

 

앞으로 이 회장은 우리의 미학을 모르는 현 지망생들의 사고방식을 제대로 깨우치게 하고, 우리 문화를 알게 하고 K-미술을 K-아트와 함께 세계 화단에 올려 놓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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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의 산곡에서’, 1935년, 캔버스 유채, 131×196.y026. 삼성리움미술관 소장(사진 : 이채원 회장)    

 

이인성 화백은 대구의 평범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미술전문학교가 없어 진학을 하지 못한 가운데 당시 정치가이자 화가였던 서동진(徐東辰)등의 선후배와 함께 영과회, 향토회 등의 활동을 하던 차에 1931년 일본에 건너가 1935년까지 머무르며 도쿄의 太平洋美術學校에서 데생과 그림 수업을 받았다.

 

그는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뒤로 1936년까지 천부적 재능과 신선한 표현 감각을 발휘한 수채화와 유화로 입선·특선을 거듭해 천재 화가로 호평을 받았다.

 

이 화백은 1932년 전일본수채화회전을 비롯 당대이 유명한 미술대전에서 잇달은 입상을 해 한국인으로서 천재성을 보였다. 이후 1937년부터 1944년의 마지막 전람회까지 가장 성공적인 위치의 추천 작가로 지내왔다.

 

그는 유럽의 근대 회화 사조인 인상파·후기 인상파·야수파·표현파 등을 섭렵했으며, 자신의 기법으로 이들을 자유롭게 활용해 수채화의 본질적 묘미와 높은 차원의 표현성을 발휘해 세계적인 화가가 됐다.

 

1945년 무렵 서울 이화여고 미술 교사, 광복 이후 이화여대 미술과 강사, 조선미술가동맹 부위원장, 조선미술문화협회 창립, 1948년 국화회(國畵會) 회화연구소 개설 후 수채화와 유화 지도를 했으며,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추천 작가로 서양화부 심사 위원에 선임됐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 중 불의의 사고로 작고했다.

 

이후 그의 작품은 회고전(1954), 유작전(1975), 근대화단의 귀재 이인성 작고 50주기 회고전(2000,호암 갤러리), 요절과 숙명의 작가전(2001, 가나아트센터) 등으로 이어졌다.

 

이채원 기념사업회 회장은 교회도 좋지만 성경책을 만드는 사업이 필요하듯, 이인성의 작품도 중요하지만 카타로레죠네(평전)사업을 진행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현재 이인성 선생의 미술정신을 계승하고 유작 보존을 위한 운동을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시상으론 이인성미술상(대구미술관), 공간으로 이인성체험관(대구 중구청), 이인성 아르스 기념관 조성(대구 중구청), 천재화가 이인성 카페(대구 약령시), 명사 이름을 딴 아트작품으로 이인성 디자인 아트(기업) 등이 다양한 양태로 구현되고 있어 작가의 천재성은 더욱 빛나고 있다.

 

 

이채원 이인성기념사업회 회장은 천재 작가의 정신과 작품세계를 발전시켜 근대 미술의 근원을 밝히는데 천착해 나가면 세계적인 K-미술, 더 나아가 K-컬처와 함께 한류의 글로벌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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