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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금융·노동 전문가 김명수 원장(한국노동경제연구원)을 만나

불굴의 휴먼니스트, 진정한 나눔과 봉사의 삶 이어져

이민영 기자 | 기사입력 2023/12/02 [03:22]

[인터뷰] 금융·노동 전문가 김명수 원장(한국노동경제연구원)을 만나

불굴의 휴먼니스트, 진정한 나눔과 봉사의 삶 이어져

이민영 기자 | 입력 : 2023/12/02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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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노동 전문가, 김명수 한국노동경제연구원장은 무엇이든 최고를 지향하며 열정적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시사앤피플] 김명수 한국노동경제원장(60)은 격변의 80년대와 90년대의 굴곡진 시대를 지나면서 동시대의 사람들과 다른 해법으로 이를 극복하고 성찰해 왔다.

 

김 원장에 대해 혹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주인공처럼 망망대해에서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자신과 싸우고 주변 환경과 싸워온 노인과 같이 선이 굵은 삶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는 그의 발자취와 성과물, 또한 그의 지인들의 증언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는 어려운 형편 가운데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홀홀 단신 서울로 상경해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참여로 질곡의 시간을 보냈다. 이후 성균관대 법과대학에 입학해 졸업과 동시에 국내 유일 산업자금을 공급해주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에서 26년간 근무했다.

 

산업은행 입사 당시부터 그는 국가 산업과 경제의 주축이 되는 국책은행의 역할과 그 일원으로서의 포부를 가지고 금융인으로서 차곡차곡 빛나는 경력을 쌓아 나갔다.

 

IMF 시절 단잠을 설치며 어려운 각 기업에 수 조원을 공급하며, 대한민국 경제를 회생시키는데 일조했다. 또한, 금융강국만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해 당시 노조위원장시절 민유성 산업은행 총재와 뜻을 같이 하며 산업은행을 세계적인 민간투자은행으로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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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신림동 학원가에서 노동법 명강사로 통했던 그 시절 김명수 원장의 강의 모습, 그는 은행노조위원장 출신으로서 노동법 관련 100여권의 저서를 가지고 있어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변화를 두려워 하는 일부 인사와 박근혜정부의 반대로 그 뜻을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 산업은행이 부산 이전을 앞두고 있지만,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금융강국으로 갈 수 있을지의 여부는 아직 미지수이다. 시간을 두고 살펴볼 일이다.

 

무엇보다도 김 원장은 우리 정치와 사회의 그늘 안에 숨겨진 약자들의 아픔을 보게 되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통로가 되기로 결심하게 됐다. 그는 1995년 처음 노동조합에 입문해 알아야 이긴다는 신념으로 노동법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분석해 이 분야 전문가가 됐다.

 

백여권의 책을 집필하고 관련 지식과 정보를 널리 공유하면서 고려대 노동대학원 졸업 후 4년여동안 총교우회장을 역임했고 여기에서 정·관계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인맥을 넓혀갔다.

 

이후 그는 산업은행 노동조합 위원장과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금융노조의 체제 정비, 역량 강화를 위한 노력을 통해 금융노조의 외연 확장 외에 본인의 내적 역량을 급성장시켰다.

 

이 시절 그는 노동법을 전공해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금융·노동분야 전문가로 재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그는 신림동 학원가에서 노동법 강의를 했는데, 고시 수험생들이 그의 족집게 특강을 듣기 위해 수강 쇄도의 촌극을 벌일 정도로 그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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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수 원장은 사람을 좋아하고 감성이 넘치는 휴머니스트이다. 꿈과 비전이 있는 지인들을 규합해 미래국정포럼AMP 과정을 개설해 4기까지 진행했다.    

 

 그의 지인 김 모씨에 의하면 그는 하루 수천만원, 또는 1억원 가까운 강사비와 교제비를 받을 정도의 노동법 명강사였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주어진 현실 가운데에서도 본인 역량 강화를 통한 내공과 또 다양한 역할 수행을 통하여 더 폭넓은 꿈과 비전을 만들어 갔다.

 

이렇게 전문가를 넘어 명망가가 된 김 원장은 2010년 한국노동경제연구원을 설립(노동부 인가)해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기관으로 만들었다. 그는 좌·우 진영이 상호 입장을 배려하면서 조정, 견제, 균형의 역할을 하고, 좀 더 발전되고 성숙된 노사관계를 만들어 가도록 조력했다.

 

그는 고용문제의 해결, 현장 지도는 물론, 금융기관 활용에 대한 컨설팅도 마다하지 않고 사회 봉사활동을 일상화해 나갔다. 이후 미국 웨스트조지아대학교 AMP를 마친 어느 날 한 정당으로부터 간곡한 연락을 받고 우리 사회의 변화를 위해 마침내 정치권에 입문하게 됐다.

 

김 원장은 2016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천 남동구 갑에 출마하게 됐고, 2년 뒤인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 같은 지역구에서 출마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리고 2년 뒤 2020년 지역구를 달리해 예비후보 등록을 한 바 있다.

 

이러한 낙선의 아픔 이후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사회 봉사활동, 인재육성 등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로타리 활동과 최고위 과정을 운영 등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위한 체질 개선에 미력이나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다 20대 대통령 선거 때 국민의힘 소속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면서 정부여당 소속 정치인으로 다시 참여하게 됐다.

 

지난 1121, 국민의힘은 국민의 뜻대로 국민과 더 가까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4월 총선을 준비하는 중앙위원회를 조직했다. 90% 이상이 바뀌는 이번 조직 개편에서 김 원장은 정당으로부터 인정받아 국민의힘 중앙위원회 재정금융분과위원장에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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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수 원장은 지난 9월 서울명수로타리클럽을 창립해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남다른 열정으로 수천명의 명사들과 인맥을 형성하고 있어 휴먼니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김 원장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고, 인간을 좋아하는 휴머니스트이다. 그는 지인들과 어울려 활동하거나,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최고위 과정을 개설해 배움을 즐기며, 또는 로타리클럽을 결성해 더 실질적인 봉사를 하고자 했다.

 

2020년 연구원 소속 미래국정포럼 최고경영자과정 개설은 최근 제4기까지 수료해 200명을 배출했으며, 지난 91220년 동안 한성 로타리클럽 회원으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서울 명수 로타리클럽(RI D-3650 Seoul Myungsu RC)’을 창립해 본격 봉사활동에 나섰다.

 

김 원장의 굵은 삶은 대학졸업-산업은행 입사-노동법강의 명강사-대학원 총교우회장-노조위원장-한국노동경제연구원 설립-미국 웨스트조지아대학교 AMP-정치권 입문-국회의원 출마-퓨텍 대표이사 취임-20대 대선 윤석열후보 지원-최고위과정 개설-로타리클럽 설립 등으로 이어지면서 더 선명해지고 있다.

 

 김명수 원장의 지속되는 인생 대장정은 과연 어디까지 가게 될지, 또한 어디를 향하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열정이 넘치고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그의 열정은 우리 사회와 인간을 사랑으로 잇는 휴먼 플랫폼으로 더 따뜻하고 더 멋지게 재탄생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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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노동법 저서를 출간했을 때 노동법 등 사회과학분야 명사들이 김명수 원장(좌측 4번째)의 저서 출간을 축하하고 있다.   

 

이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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