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이민영 기자 = 사)한백통일재단(이사장 이자형)이 지난 달 25일 서울지방변호사회 광화문 변호사회관 10층 조영래홀에서 안나 카민스키(Anna Kanminsky)독일연방독재청산재단 사무총장을 초청해 “독일통일과 북한인권문제”라는 주제로 특별 강연을 했다고 4일 밝혔다. 이 강연은 통일부 국립통일교육원에서 후원했다.
이자형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윤석열 정부는 북한주민의 인권증진 활동을 지원하고 국내외협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통해 북한 인권 실상을 알리고 국제사회의 북한인권 메카니즘에 주도적 역할자”로 북한인권문제를 중요시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한백통일재단은 북한인권 증진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 국내외 공감대를 확산하고,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북한 인권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고 말했다.
정용상 동국대 명예교수는 격려사에서 “안나 카민스키 총장의 귀한 말씀이 남북통합에 이은 통일 대한민국을 이루고 북한 인권개선을 이루는 마중물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으며, 김용길(한백통일재단 독일본부 대표) 한국자유총연맹 독일지부 회장은 인사말에서 “구동독과 공산주의 체제하의 정치적 억압과 박애로 인권이 유린되었으며,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고 말했다.
특강에 나선 안나 카민스키 독일연방독재청산재단 사무총장은 공산주의 동독 40여 년 역사를 ‘조직적 인권 침해, 표현·정보의 자유, 집회·종교의 자유를 억압한 시간’으로 본다. “동독 내 정치범이 25~30만 명 정도였다. 이들은 국경지역 내지 구소련으로 추방당하거나 처형당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공산주의 체제에서 탈출한 가장 큰 이유는 크고 작은 무수한 인권·시민권 침해, 횡포·보복·협박 때문”이었으며 ‘이동의 자유 억압’ ‘주민의 사생활 감시’도 고통이었다. 이것이 “근본적인 인간 존엄성 침해의 문제를 야기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새로운 독재정권 수립에 반대하며 시위하는 젊은이들의 집단이 형성되면서 수천 명이 체포·처형되거나 소비에트 연방의 강제수용소로 이송됐다”고 한다. 카민스키 총장에 따르면 베를린장벽이 건설된 1961년까지 공산주의 체제로부터의 탈출자 수가 동독 인구의 25%(400만 명)에 달했다. 1300명 이상이 탈출과정 내지 마지막 단계인 베를린장벽 지점에서 총살당했다.
탈출 후 서독 정착 과정의 어려움 또한 언급됐다. 고스란히 우리 탈북민의 고민과 겹친다. 동독 주민들이 “소유와 자기결정적 삶의 소망’을 품고 탈출을 결심”했으나 “새로운 체제·환경에 버거워하기도 했다. 자유민주주의 절차를 새로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서독의 기존 사회 역시 변화를 겪었다.
특히 안나 카민스키 사무총장은 서독 정부가 1969년 ‘신동방정책’으로 동독과 타협을 추구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인권문제를 적극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 논란거리”임을 전했다. “심지어 동독의 권력자들과 ‘협력’이 있었다”고 꼬집었다. 또한 김대중정부 이래의 햇볕정책이 북한 주민의 삶과 인권 개선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북한정권과 ‘협력’한 것에 불과한 것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이른바 진보정권들이 북한인권을 거론하기 극력 피해 왔다는 사실의 의미도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이날 행사에는 100명의 청중들이 참석하였으며, 안나 카민스키 사무총장에게 감사패 전달과 함께 독일통일과 구동독 공산정권의 인권침해에 대해 많은 관심과 북한주민의 인권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국민공감대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국내외적으로 북한인권 침해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민영 기자
mylee063@naver.com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