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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찬 컬럼] 신념체계로서의 종교와 과학

시사앤피플 | 기사입력 2024/11/01 [21:25]

[채수찬 컬럼] 신념체계로서의 종교와 과학

시사앤피플 | 입력 : 2024/11/01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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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찬 경제학자, 카이스트 교수    

 

[시사앤피플] 전쟁 때문에 이스라엘도 러시아도 방문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평화의 소중함을 새삼스레 느낀다. 한국관광객들은 동남아시아나 유럽을 많이 찾게 되었다. 유럽도시들을 방문하다 보면 곳곳에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교회와 성당들을 지나칠수 없다. 그런데 막상 교회나 성당에 들어가면 현재보다는 역사를 느끼게 된다.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의 입장이 사회적 이슈를 보는 여러 시각의 하나로 밀려났다. 예를 들어 동성애, 낙태 등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은 이슈들인데 항상 논쟁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입장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보고자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근대의 계몽사상가들이 합리성에 기초한 인권과 민주주의 체제를 옹호했고 그 토대 위에서 사회체제에 진보가 이루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역설적인 것은 예를들어 '인권은 천부적이다'라는 표현이 '권력은 하늘에서 온다'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교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은 믿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종교의 대척점에 과학을 둔다. 하지만 과학도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념체계에 기반하고 있다.

 

과학에서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경험, 곧 실험 또는 관찰을 통해 정당화하거나 부정한다. 종교에는 교리가 있고 이를 정당화하는 것은 삶 속에서의 체험이다. 과학의 가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종교에서 기본적 교본은 그대로 있으나 그 해석은 변화한다. 그래도 과학의 신념체계가 더 개방적이고 진보적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과학의 특징은 겸허하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스스로를 절대적 위치로 끌어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스스로 목적 아닌 도구의 위치로 자리매김한다. 이 또한 역설적이다. 종교가 원래 지향하는 바는 하느님이나 절대적 진리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가 자신을 하느님이나 진리와 동일시하여 오만해지는 게 역사적 경험이다. 단언컨대 예수, 석가모니, 무함마드가 세상에 다시 온다면 현대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의 도그마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가 오만해지면 인간과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게 아니라 문제를 일으킨다.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분쟁의 한 축은 종교다. 중동으로 가보자. 이란은 이슬람교 신정체제 곧 종교 지도자가 정치권력을 지배하는 체제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빠지면 현재의 정권이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다. 이란은 자신의 이슬람교 신정체제를 무력으로 주변국에 확산시키려는 작업을 계속하고 하고 있어 이에 위협받는 주변국 정권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다.

 

이스라엘은 테러에 대한 방어라고 하지만 마치 하느님의 명령을 내세워 주변 족속들을 살육하는 유대교

경전 속의 이야기처럼 주변국의 민간인들을 지나치게 살상하고 있다. 종교의 오만이 세계평화의 큰 걸림돌이다. 종교뿐만이 아니다. 민족주의든 공산주의든 어떤 신념체계가 개방성과 진보성을 잃고 폐쇄적이고 퇴행적으로 가면 평화와 삶의 향상보다는 분쟁과 파괴의 도구가 된다. 나치 독일도 김씨왕조가 지배하는 북한도 그 뿌리는 배타적 이데올로기다.

 

그러면 과학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 역사적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은 삶의 비약적 향상을 가져왔다. 물론 과학기술은 세상에 해로운 일을 하는 도구로도 쓰여왔다. 현하 핵폭탄은 지구를 초토화하여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핵전쟁의 결과가 가공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전쟁이 억제되는 측면도 있다. 어쨌든 과학기술은 양날의 칼이다.

 

칼이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고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과학기술은 인류의 향상을 위해 활용되어야 한다. 다른 각도에서 다시 묻자. 과학이라는 신념체계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 인간은 믿음없이 살 수 없다.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이나 절대진리를 경배하는 사람도 있다.

 

쾌락을 믿는 사람도 있고 이타적 사랑을 믿는 사람도 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과학은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신념체계다. 자연과 사회를 이해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인류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선택지를 제시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기능이다.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가치체계에 따르겠지만, 선택지가 올바르게 제시되는 것이 문제해결의 절반이상이기 때문이다. 현대세계에서 종교적 신념체계는 그 빛을 잃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기성종교들의 기관과 제도는 당위성과 신뢰를 많이 상실했지만 그 가르침은 여전히 인류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싸우는 이슬람교도와 유태교도에게 어느 중재자가 기독교 정신으로 화해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우스개 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이슬람교와 유태교는 기독교처럼 모두 아브라함 기원의 종교다.

 

* 채수찬 경제학자 • 카이스트 교수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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