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세상에는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들도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그 중 하나다. 이상적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국가가 공존하는 해법이 그것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한 1993년의 오슬로협정은 두 국가 공존으로 가는 큰 걸음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에 다 이 해법에 동의 하지 않는 불만세력이 있어 사보타지하고 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실현될 전망이 없다. 이스라엘의 극단적 세력도 팔레스타인의 극단적 세력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 존립근거를 제공한다.
그들은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 있고, 이데올로기는 냉혹한 현실에서 더 에너지를 공급받기 때문에, 다른 세력들에게 잠시 밀려나더라도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나 주도권을 장악한다.. 팔레스타인 문제 말고도 세상에는 해법이 있어도 해결을 못하는 일들이 많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이스라엘 접경의 레바논만 봐도 종교가 다른 몇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수십년간 무력으로 충돌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나라는 파탄 상태다. 누구의 주장이 옳으냐 하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이 정해진다. 절대적인 관점이란 없고 상대적인 관점만 있다는 물리학의 상대성 원리가 인류를 구성하는 종족들 간의 상호투쟁에도 적용된다고 해야 할까.
동물들의 행동을 보면 거의 모든 행동이 진화과정에서 형성된 유전자에 쓰여 있는 대로 진행된다. 인간의 행동도 진화과정과 역사적 경험을 벗어날 수 없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인류에게 타고난 습성에서 벗어날 혁명적 비전과 진로를 제시해 왔지만 인류의 행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무자비한 전쟁은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 뿌리가 되는 서로 대립하고 배척하는 집단행동이 일상적으로 행해진다. 현실정치에서 마키아벨리적 접근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런 연유다.
냉혹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나이브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최근 외교 행보들을 보면 단순하고 낙관적이며 나이브하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 보고 깊게 계획하는 전략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복잡다기한 상황을 살펴 그 본질을 파악하고 이를 정리해서 정책화하는 식견을 지닌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반도 남북관계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나이브한 정책이 아니었다.
한반도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현실적으로 접근하여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으려는 전략적 내용이 담겨져 있는 정책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햇볕정책은 공도 있고 과도 있다. 공은 남북한 교류를 활성화한 것이고, 과는 북한의 핵무장을 막지 못한 것이다. 햇볕정책의 한 부분이었던 북핵불용이라는 원칙은 결과적으로 공허했다.
북한이 속임수를 쓰는 상황에서 그 원칙을 실행할 수단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현정부가 강조하는 이념적 접근은 단순하다. 복잡한 사고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를 좇는다. 이데올로기는 편리하다. 어떤 문제든 자신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를 적용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면 된다.
국제관계든, 경제문제든, 사회적 이슈든 이데올로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면 되기 때문에 매우 편리하다. 이데올로기적 접근법을 쓰는 사람들은 항상 있다. 그러나 한국이 처한 현실적 상황은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할 만큼 녹록지 않다. 태극기부대나 개딸들이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하는 것은 사회적 현상이라고 봐줄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이데올로기라는 모노레일을 타는 것은 문제다. 그걸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도하 등 중동국가들을 방문하고 있다. 투자유치 등 주로 세일즈 외교다. 국제관계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히고 있으나, 민간인을 살상하면 안된다는 정도의 바닐라 메시지다. 무자비한 살육이 행해지고 있는 분쟁지역을 방문하고 있음에도 그런 심각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도 이제 경제에서는 세계의 리더국가 중 하나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는 리더 역할을 못하고 있다. 며칠 전 조 바이든 미국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하였다. 이스라엘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표명했지만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에 대해서는 분노 때문에 자제를 잃지 말 것을 요청했다. 바이든은 국제관계에 관한 한 미국 최고 반열의 전문가요 전략가다.
필자가 2003년 다보스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미국 네오콘들의 이라크 침공을 냉소적으로 예견했다. 그 여세를 몰아 북한의 핵시설도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두려움을 느낀 김정일은 한동안 지하에 숨기도 했다. 이라크 침공 뒤 미국은 진창에 빠져 네오콘들은 북한을 손보지 못했다. 바이든은 중동사태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막는 일에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 채수찬 경제학자 • 카이스트 교수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시사앤피플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