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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건국의 아버지 석오 이동녕 선생 83주기 추모제 주도 이종억 소장(보학연구소):시사앤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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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건국의 아버지 석오 이동녕 선생 83주기 추모제 주도 이종억 소장(보학연구소)

오직 건국에 일념한 석오 선생, 역사적 재평가 돼야 한다.

이민영 기자 | 기사입력 2023/03/04 [07:55]

[인터뷰] 건국의 아버지 석오 이동녕 선생 83주기 추모제 주도 이종억 소장(보학연구소)

오직 건국에 일념한 석오 선생, 역사적 재평가 돼야 한다.

이민영 기자 | 입력 : 2023/03/04 [07:55]

▲ 이종억 보학연구소 소장((74/연안 李씨)이 석오 선생에 대해 설명하고 있음   

[시사앤피플] 이민영 기자 = 오는 13일은 건국의 아버지로 인식되는 석오 이동녕 선생(연안 )이 서거한 지 83주기(1940.3.13.)되는 날이다. 이와 관련 이종억 보학연구소장(74/연안 )올 추모제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선생의 묘소에서 석오 선생 서거 83주기 추모회로 개최해 문중은 물론 전 국민이 석오 선생의 정신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번 추모제는 코로나19와 그 외 원인으로 인해 최근 몇 년 동안 중단됐다가 재기하는 행사로써 향후 국민적 관심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국회의장)과 임정 5대부터 17대 중 5번의 임정 수반(대통령)을 지낸 석오 이동녕 선생의 추모행사이기 때문이다.

 

이종억 소장은 대한민국은 헌법에 명시된 바와 같이 임시정부의 적통을 이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에 석오 선생의 은공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또한 석오 선생의 생애와 대한민국의 건국의 기여도를 높이 평가하고 역사적 의미를 충분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석오 선생은 해방이 되기 5년전 작고함으로써 김구 선생이나 이승만 초대 대통령 등 건국 초기 지도자들에 비해 저평가되거나 또는 이분들의 그늘에 가려져 실제 위대한 업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이 소장은 임시정부는 1919년 상하이에서 조직돼 1940년 충칭으로 옮길 때까지 8번이나 임정 본부를 옮겨 다니면서 투쟁을 통해 건국의 기틀을 만들었다, “석오 선생은 그러한 혼란 속에서도 건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5번이나 임정 수반(대통령)을 한 분이여서 건국의 아버지라 아니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소장은 당시 김구를 비롯한 관련 인사는 석오 선생의 후배여서 제자와 같은 애정으로 마음을 쏟으며 지냈다, “석오 선생이 작고한 1940년 김구 선생은 추모사를 통해 그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 석오 선생이었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고 전했다. 

 

▲ 석오 이동녕 선생(연안 李씨, 1869~1940)    

이 밖의 기록을 보면 석오 선생이 애국 동지에 대한 애정과 국가에 대한 애국정신이 얼마나 출중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최근 천안시는 유관순 누나와 함께 석오 이동녕 선생을 지역의 역사 인물로 상징하거나 브랜드화 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천안시 석오이동녕선생서훈상향범시민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는 천안시민, 나아가 충남도민들의 바람 중 하나는 석오 이동녕 선생의 서훈을 1등급(대한민국장)으로 상향해야 한다는 뜻을 모으고 20만명의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서문동 추진위원장은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지속되는 것으로 그 의미는 상당하다""광복 77주년이 흘렀지만 이동녕 선생은 중·고교 국정교과서에 이름 한 줄 없이 잊혀져 왔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 민족의 여명이셨던 선생이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석오 선생 추모사업을 주관하는 연안 이씨 이종억 소장은 자신의 5대조 이국녕(李國寧)선생이 석오 선생과 같은 항렬이고, 조모 청주한씨(淸州 韓氏)께서 외사촌간이라 어려서부터 석오 선생에 대한 어르신들의 말씀을 많이 듣고 성장해 석오 선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술회했다.

 

석오 선생은 186910월 천안 목천면 동리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되던 해 일가가 서울로 이사해 종로에서 정착했다. 1892년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구국운동을 시작했다. 1897년 종로 만민공동회에서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상소했다가 이준·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신민회를 조직했으며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의 초대 소장(교장)으로 무장독립운동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국회의장)을 지냈으며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임시헌장(대한민국 헌법 근간)에 민주공화정부수립을 선포해 우리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석오 선생의 묘   

 또한 석오 선생은 주석(대통령)5차례 역임했으며 국무총리, 국무위원 등 중책을 맡아 실질적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리더였고 건국의 아버지 역할을 한 독립투사이고 애국지사이다.

 

이종억 소장은 지난 28일 국회 일부 의원(김씨)들이 임시의정원 김마리아 임정의정원 초최 여성의원 동상을 세우자고 주장하는 것처럼 깨어 있는 국민들과 함께 석오 선생도 재평가 작업이 돼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서울시가 종로에서 평생을 살아온 석오 선생의 어록과 유훈, 그리고 집터와 행적 등을 사료화하거나 관광 명소화 하지 않고 소극적인 것 같다, “없는 것도 만들지언정 훌륭한 업적과 흔적이 있음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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