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희망보다는 절망이 큰 사회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발전하여 왔다. 경제는 성장했고 국민의 삶은 좋아졌다.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 중진국으로 이제 선진국이 되었다. 1955년 1인당 GDP는 64불이었지만, 2021년 3만 5천 불로 늘었고, 인구가 5,000만 이상의 나라 중에서는 일본을 넘어 6번째인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고대하던 선진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넘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일본까지 넘어선 나라가 되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것이 좋을 것이고 더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경제는 성장하여 선진국이 되었지만 선진국 중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어쩌면, 전세계에서 가장 미래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어두운 나라가 되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하는 나라였고, 가장 모범적인 발전을 이루어 다른 나라의 본이 되는 나라로 여겨졌다. 그런데 현재는 출산율이 사상 첫 0.65대의 초저출산 국가이고, 그에 따른 초고령사회로의 이행도 다른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나라가 되었고, 태어난 아이들도 행복하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왜 이런 결과를 낳았을까? 대한민국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갔다. ‘하면된다’는 신념으로 나라를 발전시켰고, 선진국이 되었다. 선진국이 빠르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중요한 가치들을 “선진국이 된 다음”으로 미루었다.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을 미루었다. 경제가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모든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단 될 사람, 될 기업을 밀어주는 것이 국가를 발전시키는 동력이었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을 향해 나아갈 때, 교육은 개인에게는 계층상승의 도구였고, 국가와 기업에게는 양질의 노동력과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기능을 충실히 담당해왔다. 학교와 가정, 사회, 국가의 경쟁과 성장중심의 시스템을 통해서 우리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를 발전시켜왔던 상명하복의 권위주의 시스템,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는 구조와 시스템은 선진국이 된 나라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기제이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법과 제도 시스템(교육과 복지시스템)등을 열심히 들여와 형식은 거의 모두 갖춘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선진국이 100년 이상을 거쳐 사회적 합의와 투쟁을 통해서 만들어 낸 여러 가지 가치와 철학은 우리 사회에 제도와 시스템을 움직이는 내적 가치로 스며들지 못하였다.
특히 산업화를 통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통한 시민의식의 성장이 사회적 합의 과정을 통해서 선진적인 제도와 시스템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유럽의 가치가 보편적인 인류의 가치인 양 이념 안에서만 머물고 기계적으로 수용되었을 뿐이다. 우리 사회가 이제 기존의 권위주의 시스템과는 다른 가치와 철학에 기초한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는 신호가 나타났지만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변화에 따른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은 사실 최근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10년 이상 쌓이고 쌓여서 분출하는 현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교실붕괴’는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체벌이 제도적으로 금지된 이후 학생에 대한 규율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 당국의 공식적인 지침이나 방식은 없었다. 학생에 대한 지도는 교사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일 뿐, 교사를 가르치는 교대와 사범대에서 교사의 자질로서 길러질 공식적인 내용이 된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권위주의 사회를 벗어난 민주국가에서 체벌이 아닌 민주적인 규율과 훈육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교육계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학생인권헌장 이전에 민주적 교육이 무엇이고, 민주적 규율과 훈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식적인 지침, 혹은 공감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교육개혁은 없었다. 서울대를 누가 갈 것인가를 정하는 수시, 정시 논쟁만 있었을 뿐 학교가 무엇을 해야하고, 우리의 아이들, 소년들, 청년들은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의 어떤 구성원이 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과 그를 위한 교육개혁의 논의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 70%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학교가 그들에게 의미 있는 교육적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었다.
필자는 학교의 실패와 가정의 실패로 인한 희생자들에게 관심이 있다. 은둔형 외톨이, 느린학습자, ADHD를 가진 아동 및 청소년의 증가, 학교폭력, 아동학대, 청소년 자살율의 증가, 도박과 마약의 증가, 묻지마 범죄, 자립준비청년 .... 과거와는 다른, 적어도 2000년 이전, 20세기의 한국과는 다른 사회적 문제가 우리의 아이들, 청소년들, 청년들을 힘들게 하는 한국사회의 핵심적 문제로 만성화되었다.
2. 대한민국이 사회문제를 풀어가는 방식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두 가지로 풀어간다. 첫째는 처벌강화이다. 학교폭력이나 묻지마 범죄, 촉법소년 등 다양한 자극적인 사건에 대해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그에 따라 처벌이 되었느냐에만 관심을 갖는다. 양천구 입양아 학대 사망 사건(정인이 사건)이 난 후 우리 사회는 가해자인 양부모에 대한 처벌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 후 다른 아이가 학대로 사망하면 정인이에게 주었던 관심의 수십 분의 1로 줄어들고, 또다시 몇 달이 지나 사망하면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누구의 죽음이 자극적인가 아닌가에만 관심을 갖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쓰면 그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고 치부한다. 제대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대안을 찾고 그에 기초해서 문제를 풀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담당자를 만들고,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등으로 재정을 투입한다. 예를 들어 학교현장에 학교폭력의 문제, 학부모와의 갈등이 심화되자 교육청에서 내어놓은 해결책은 학교마다 담당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이다. 상근 변호사는 아니지만 댓가를 받고 법률적인 자문과 상담 등을 해주는 방식으로 답을 찾는 것이 대한민국이다. 원인을 찾아서 그 근본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라는 수단으로 교육 재정을 활용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항상 문제가 생기면 모든 언론이 나서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보도한다. 그리고 희생양을 찾아서 조리돌림을 하고 난 뒤, 모두가 잊는 과정을 반복한다. 여론이 대중적으로 분노를 일으키고, 또 공감을 일으키게 되면 바로 해답을 찾아야 하므로 가해자의 처벌에 집중하고, 재정 지출을 통해서 진지하게 접근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3. 성장 중심의 사회가 낳은 희생양
생각해보자. 은둔형외톨이, 느린 학습자 문제, 묻지마 범죄, 아동학대, 학교 폭력, 그리고 저출산, 고령사회 등 우리의 현재 문제 중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고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필자는 우리 사회가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 미루어왔던 과제들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고 넘어왔기에 현재의 문제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은 성장, 성과, 경쟁을 통해 사회를 빠르게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을 위해 희생시킨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선진국이 되어 기쁜 우리는 글을 쓰는 50대(또다른 의미의 586)가 가장 수혜를 입은 세대이고, 청년세대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으로 체념하는 사회가 되었다. 좋은 일자리도 없고, 미래가 더 좋을 것이라는 희망도 없다고 한다.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한국 경제가 더 성장해서 3만 5천 불에서 7만 불이 되는 길일까?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위의 문제는 돈이 없어서 생긴 것일까? 돈을 써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해결 방안이 아님을 이미 지난 10년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만 더 쓰면 해결될 것이라는 착각을 계속한다. 물론 돈을 쓰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별하지 못하고, 상관관계에 따른 부수적인 부분에 돈을 쓰고, 미봉책만 남발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우울한 미래를 그리는 대한민국을 만들어갈 수 밖에 없다.
왜 지금 우리 사회는 이렇게 어렵고 힘든 사람이 많고 전에 없던 문제들이 나오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행복지수가 매우 낮은 사회이다. 공부를 왜 하는가? 왜 열심히 사는가? 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이다. 왜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가? 남보다 잘 살기 위해서이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재정적으로 풍부해서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우리나라 국민들의 삶의 지향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돈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질문을 바꾸어 보자.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평균적으로 누릴 수 있는 건강한 삶은 무엇인가? 답을 할 수 없다. 다시 돈에 대한 질문으로 회귀한다. 최저생계비,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들로 모든 것이 정리된다. “돈”이 문제의 시작이자 해결책이다. 경쟁과 성공, 서열, 낙수효과, 부정적 의미로는 각자도생! 이러한 개념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기본적인 담론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고, 국민들 모두의 목적이 되었다. 돈은 행복하기 위한 수단임에도 그 수단이 목적이 된 사회가 되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행복하지 않은 사회가 된 것이다. GDP를 올리는 것이 최고선인 사회에서 그것과 연결되지 않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고, 성장에 따른 부작용이고, 돈을 써서 해결하면 되는 부차적인 문제로 여겨졌다.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고, 힘들다고 여러 신호를 보냈지만 중요하지 않은 문제, 하찮은 문제로 여겨지고, 일탈이나 혹은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어 왔다. 은둔하고 고립되고, 고독사하고, 자살하고, 아니면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고, 그것이 쌓여서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행복도가 가장 낮은 나라, 초고령, 초저출산의 국가가 된 것이다.
4. 경쟁과 의존 그사이에 살 자리 만들기- 한국 교육의 방향 전환
문제의 근원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경쟁이 중요한 사회원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경쟁시스템은 필요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핵심 원리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경쟁만이 최고의 선이 되는 사회, 경쟁을 통한 부의 획득이 최고선이 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을 고민해야할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성공과 경쟁과 함께 협력과 연대, 모든 구성원을 존중하는,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담론의 형성이 만들어져야 문제는 해결된다. 이런 고민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면 빠르면 10년 후 늦어도 20년이 지난 후 대한민국은 지금과는 다른 행복한 사회의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의사, 변호사, 공무원, 교사, 대기업 회사원...이러한 직업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 얻을 수 있는 20세기 대한민국 최고의 일자리로 여겨졌고 미국의 전 대통령 오바마가 부러워했던 한국식 교육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제조업을 통한 노동집약적 산업의 성공으로 한국은 선진국으로 진입했다. 21세기가 되어 4차 산업 혁명에 따른 AI와 로봇의 시대에서도 한국산업은 세계적 경쟁에서 비교우위를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대한민국은 국가 간 경쟁, 개인 간 경쟁에서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기에 경제성장과 산업혁명에 맞는 ‘창의적 사고’를 해야하는 새로운 직업군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맞춤형 교육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교육의 과제라고 한다. 그러나 ‘시험’이라는 경쟁을 통해서 서열이 정해지고 그에 따른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해주는 교육의 사회적 기능은 이제 수명을 다 했다.
필자는 국가나 산업의 필요에 따른 인력양성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는 현재의 교육체제가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해야 현재의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기존의 경쟁시스템을 해체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시스템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경쟁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이기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의 선택이라면, 경쟁하지 않고 사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국가의 교육목표가 경쟁을 통해 산업과 사회구조에 필요한 인력양성만을 두는 것에서 벗어나 모두를 위한 교육, 즉 대한민국에서 교육을 받는 모두가 소외되지 않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능력이 있는 학생이든, 능력이 없는 학생이든, 느린 학습자이든, 자신을 성장시켜주는 교육으로 목적이 바뀌어야 한다. 경쟁하지 않고도 자신의 건강한 삶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회가 복지국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리가 좋은 학생, 노력하는 학생,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학생, 부모에 의해서 항상 준비된 학생만 학교의 교육 대상이 되어야 할까? 일방적 강의 – 시험 – 성적을 통한 서열정하기는 현재 실패한 한국 학교 교육의 기본틀이다. 누가 시험문제를 많이 맞추느냐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학생에게 필요한 교육적 경험은 무엇이고 교육을 통한 개인의 성장은 무엇인가는 현재 한국 교육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느린 학습자, 경계선, ADHD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이 더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의 아이들은 학교에서는 “문제아동(청소년)”으로 낙인 찍히고, 교육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히려 더 많은 교육적 과제가 있음에도 공식적 교육에서는 배제되고 격리되고 열패감과 부정적 감정, 잘못된 상호작용으로 가득 차 학교를 떠나거나 억지로 졸업하게 된다. 적어도 학생 중 40%는 학교에서 아무런 교육적 경험을 하지 못한다. 즉 자신을 성장시키지 못한 채 학령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는 것이다.
존중받지 못하고, 서열을 정하는 공부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학교에서 사회성을 배우지도 못하는 대한민국의 아동과 청소년기라고 할 수 있다. 느린 학습자에 대한 고민을 왜 학부모가 해야하는가? ADHD의 문제를 갖고 있는 아동의 문제를 부모가 치료해야 하는 것이 맞는가? ADHD로 학생이 가진 어려움이 판정되면 학교 교사는 더 이상 자신의 교육대상이 되지 않는 것처럼 아이들을 다룬다. 논쟁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사회의 장애학생의 비율은 1.7%이다. OECD 국가의 장애학생의 비율은 8~15%이다.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아동(청소년) 모두를 학습장애로 보고 지원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칼을 든 아이에게 교육은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95조의 예산이 과거보다 1/4로 줄어든 학생들에게 쓰이는 데, 돈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모두를 위한 교육이란 대학 입학이 교육의 목적이 아니라 교육을 받는 학생의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을 의미한다. 학생의 성장이란 가장 중요한 청소년기를 행복을 경험하면서 성장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동과 청소년기에 사랑받고 존중받고 성장한 후 성인이 된 대학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청소년기는 행복하면 안된다는 전제 하에 학교 교육이 만들어져 왔다. 경쟁상대가 같은 학급의 친구이고, 놀면 안 되고, 잠도 많이 자면 안 되고, 행복과 여유는 대학에 들어간 후에 경험하라는 것이 학교 교육의 기본 담론이었다.
시험과 성적을 통한 서열 정하기와 지식 중심, 과목 중심의 학교 교육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 행복하지 않은 사회이기에 자신의 아이를 낳지 않는 사회가 된다고 본다. 행복을 미루다보니, 돈을 많이 벌기 위한 목적으로 모든 것을 미루고 살라는 사회시스템은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가 3만 5천 불의 선진국에서는 다른 가치를 미루고 오로지 경쟁과 성장 중심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행복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교육은 변화해야 한다. (출처 : 복지국가소사이언티 3월 4일 컬럼)
* 조준호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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