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임기내 블록버스터 혁신신약 x개' 타령은 한국 역대정부의 바이오산업 정책의 단골 레퍼토리다. 진전이 있다면, x개의 수자가 갈수록 줄어들어 이번 정부에서는 2개라는 점이다. 블록버스터 타령보다 필자가 듣고 싶은 노래의 곡목은 '단기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바이오 이전연구(Translational Research)에 연x조원씩 투자' 다.
그런데 이번 정부는 외환위기 때도 줄이지 않았던 R&D 예산을 깎는 용맹함을 보여 정부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었다. 지금으로선 민간의 동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간이 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게 있다.
대규모 장치산업인 바이오 복제약생산과 위탁생산은 한국에서 201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지만 벌써 세계수준에 도달하였다. 반도체산업과 자동차산업을 일궈낸 한국의 기업들이 못할 이유가 없는 분야들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신약개발은 다르다. R&D의 성과물인 지적재산권이 확보되어야 민간투자가 들어올 수 있다. 신약개발을 위한 R&D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미 자리잡은 거대 바이오텍 기업이 아닌담에야 공공부문에서 지원받을 수밖에 없다.
충분한 R&D예산을 보유한 거대 바이오텍이 없고 정부의 의미 있는역할도 기대할 수 없는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일한 출구는 해외자금을 활용하는 길이다. 간간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 바이오텍의 글로벌제약사로의 기술이전 계약도 크게 보면 이 범주에 든다.
해외 VC(벤처캐피털)의 투자를 구하는 길도 있겠으나, 이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가지 걸림돌은 일단 한국 VC로부터 초기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은 족쇄가 많아 글로벌 VC들이 추가투자를 꺼린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미 얘기한대로 공공부문의 R&D지원이 약해서 바이오 스타트업에 충분한 지적재산권이나 기술이 축적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필자는 유럽의 공공부문과 글로벌제약사가 협력하는 신약개발 프로그램에 한국이 그리 크지 않은 예산뒷받침으로 참여하는 길을 찾아서 지난 정부 고위정책 결정자들에게 적극 제안하였으나 마이동풍이었다.
시도도 안해봤지만 이번 정부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책결정자들이 바이오산업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다. 그런데 그보다 큰 문제는 왜 한국이 바이오산업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비전이 없는 것이다. 한국은 왜 바이오산업을 해야하는가.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바이오산업은 선진국진입의 테스트다.
왜 그런가. 첫째, 바이오산업은 공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학의 기반을 필요로 한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제 공학을 넘어 과학적 역량을 갗추어야 한다. 한국은 그동안 바삐 성장하느라 어떻게(how)에 치중했지 왜(why)를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물론 '어떻게'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왜'를 피해갈 수 없다.
'양에서 질로의 진화'라고 할까. 반도체산업이든 자동차산업이든 이제는 자본과 노동만 필요한 게 아니고 설계(Design)와 연구개발이 더 중요한 단계에 이르렀다. 이 산업들이 업그레이드되는 데에는 흔히들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막대한 정부의 R&D예산 뒷받침이 있었다.
바이오산업은 반도체산업이나 자동차산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양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고 질에서 출발한다. 과학에서 산업으로 직행한다. 공학은 효율을 높이는 보조적 수단일 따름이다. 한국이 과학기반의 바이오산업에서 성공한다면 선진국으로 올라설 수 있다. 둘째, 바이오산업은 불확실성에 도전(risk taking)하는 산업이다.
한국이 현재 잘하고 있는 산업들보다 훨씬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인 산업이다. 그동안 감당했던 도전보다 훨씬 고난도의 도전이다. 뿐만 아니라 경주 코스가 단거리가 아니고 장거리다. 바이오산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신약개발 분야에서는 신약 하나 개발하는데 10년 이상 불확실성을 감수해야 한다.
한국이 바이오산업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앞으로도 최소 20년이 걸릴 것이다. 한국은 선진국 문턱에서 자족하며 도전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창업자들이 주말없이 밤새워 일하고 있을 때, 주40시간 워라밸 근무하는 게 한국 스타트업들의 현주소다. 대기업 경영자들도 위험한 투자는 회피하고 단기실적에 몰두한다.
바이오산업을 하는 것은 한국이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다음단계로 가는 도전을 택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선진국으로 가는 문턱을 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바이오산업에서 정부의 역할에 대해 포기한다고 해놓고서, 정책결정자들에게 비전이 없음을 한탄하는 게 모순임은 분명하다. 민간주도의 바이오산업 성장을 꿈꿔본다.
해외자금 활용을 꿈꿔본다. 그래도 민간의 역량만으로는 바이오산업을 키우는데 필요한 충분한 R&D투자를 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 채수찬 경제학자 • 카이스트 교수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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