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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영 수필] 숯검댕이 묻히고, 행복느끼신 지혜로운 어머니

이민영 기자 | 기사입력 2023/04/21 [23:50]

[이민영 수필] 숯검댕이 묻히고, 행복느끼신 지혜로운 어머니

이민영 기자 | 입력 : 2023/04/21 [23:50]

▲ 이민영 시인  (본보 편집국장)  

 5월 가정의 달이 하루하루 다가오다 보니 부모님이 생각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2년 차이로 아버지는 1919년생이고 어머니는 그 보다 2년 뒤 출생했다. 그렇지만 두 분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컸다.

 

내가 어릴 적은 대부분의 집안이 가부장적인 가풍이었기에 나이에 관계 없이 남성 위주로 가정이 리드되고 있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하늘이고 어머니는 땅이었다. 근엄하시고 권위적인 아버지를 시중 들으면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우리를 키워낸 어머니이다. 그래서 더 애잔하고 그립다.

 

어찌보면 생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보여진다. 거기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너무 근엄해 무섭기까지 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남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왠만하면 순종해 버리는 것이 성격이 된 것 같아 보였다. 어머니는 자기 주장을 확고히 하지 않거나 그저 마음 편히 순응하면서 살아왔다. 지금 여성들 같으면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을 정도이다.

 

그런 가운데 어머니는 틈이 나면 나와 놀아 주거나 나를 놀려대려면서 늘상 숯검댕이를 소재로 삼았다. 소풍 갈 때 운동회 할 때 학교에서 어머니 모시고 오라 하면 니 나를 학교로 데려 가려 하면 난 숯검댕이 얼굴에 묻히고 갈거다. 그래도 델꼬 갈래라며 나를 놀려대곤 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얼마나 웃었던지 모른다.

 

어머니는 스므 살에 시집을 왔다. 1941년경 아버지와 함께 하게 되셨다. 이후 9년이 지난 한국전쟁 때의 일이다. 아마도 1951년 봄쯤 됐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인민군 군인들과 빨치산 장병들이 마을 부근 산에서 풀숲을 헤치면서 이 동네로 내려와 이 집 저 집을 뒤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어머니는 텃밭에서 일을 하는 데 옆동네에서 총소리가 끊이질 않고 나면 무슨 일이 생겼나 무서운 생각이 들어 며칠 동안 일을 중단하고 일찍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집안에서 숨어 봤자 잡힐 게 뻔하기 때문에 부엌에 남아 있기로 했다. 아버지는 인민군들이 당도하기 전에 찾기 어려운 곳으로 숨었다. 두 분은 서로 빨리 숨으라 독려를 하면서 긴박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물론 아버지도 어디론가 몸을 숨기고 숨소리를 죽이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인민군들은 우리 집에 도착했다. 대문을 발로 차면서 큰 소리로 겁을 줬다. “동무래. 아기 애비는 어디 있나? 빨리 찾거라. 어서 알려 줘라라고 고함을 치면서 아버지를 찾았다고 한다.

 

이 놈들한테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에 나는 모릅니다. 남편이 어디 있는 지 내가 어떻게 알겠소. 정말 모릅니다하면서 모르쇠로 일관했던 어머니. 마음 졸이며 긴장했던 그 당시의 상황은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순간을 극복한 이는 연약하지만 강한 어머니였다.

 

동태를 지켜 보던 인민군들은 우리 동네 거주자 명단을 보면서 '이 집 애기 아버지는 고령자로군...' 하면서 자기 동료에게 이놈은 빼놓고 가자하면서 욕지꺼리를 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도 어머니는 얼마나 기뻤던 지 몰랐다고 한다. 남편을 살려야 하니깐 말이다.

 

이들이 찾는 남자는 20대 젊은 청년이었다. 전쟁터로 다시 데려가든지 일을 시킬 요량으로 젊은 청년을 원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30대가 훌적 넘어 당시 늙은이로 분류됐다. 그래서 위기를 넘기게 된 사연을 어머니는 가끔 말해 주곤 했다.

 

그러데 또 다른 위기가 닥쳐 왔다. 인민군들은 아이를 업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디 얼굴을 보자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예쁘냐‘, ”괜찮냐하면서 얼굴을 검사하더란 것이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어머니는 그 직전 가마솥 밑에 있는 그으름과 숯검댕이를 얼굴에 비벼 바르고 있었던 상태였다. 한 군인이 동료들을 보면서 말하기를 이 동무래. 이 아낙 얼굴이 숯검댕이다라며 니는 더러워서 안 잡아 간다하면서 밖으로 나가더란 것이다.

 

어머니는 생과 사를 가르는 이 위험한 순간에도 차분하게, 또 지혜롭게 대처한 이 사례를 두고 두고 얘기하곤 했다. 그래서 그 상황을 나한테 가끔 들려 주기도 하고 나를 가끔 숯검댕이로 놀리곤 했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하루는 학교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 한다고 했더니 너 나를 계속 데리려 가려 한다면 얼굴에 숯검댕이 묻히고 학교로 갈거다, 학교 방문을 못하겠다는 뜻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웃곤 했다.

 

중학교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너 말이지 나를 학교로 데려가려 한다면 숯검댕이 묻히고 니 친구들 한테 내가 이민영이 엄마다 할 거다라며 웃어댔다. 어머니와 나는 숯검댕이를 얼굴에 묻히고 숨바꼭질을 하면서 놀기도 했다. 그 옛날의 추억이 새록 새록 되살아 난다. 나와 어머니는 둘만 알아 듣는 숯검댕이이 말만 들어도 웃음이 절로 나는 둘만의 추억을 간직하게 됐다.

 

그 이후 내가 고교 때 숯검댕이 얘기를 들려 줬다. 상당히 차원이 높은 단계의 얘깃거리였다. 어머니는 이웃동네 누구 엄마, 누구 엄마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대에 끌려가 한 달 만에 돌아온 이도 있고, 또 다른 아주머니는 얼굴이 예뻐 석달 만에 돌아온 이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숯검댕이 덕분으로 인민군에 끌려 가지 않고, 상처 받는 일을 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게 됐다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이 숯검댕이를 소재로 한 잊혀지지 않는 어머니와의 추억은 내가 어머니를 지혜로운 분으로 각인하게 된 단서가 됐다.

 

고향이든 다른 시골이든 어디에서 숯검댕이를 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최근 서울에서 살다보니 시골처럼 숯검댕이가 없어 그런지 어머니 생각을 자주 할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잊고 살았다. 하지만 5월이 되면 숯검댕이가 없더라도 어머니가 생각난다.

 

니 학교에서 어머니 델로 오라하면 난 숯검댕이를 얼굴에 묻히고 갈거다. 그래도 좋냐하면서 깔깔 웃으신 어머니가 그립다. 정말 그립다. 나도 나이가 들다 보니 더 그리워진다.

 

숯검댕이이란 말 한마디 해 놓고 자지러지게 웃으시던 어머니, 혼자서 그 웃음을 감당하기 조차 어려웠던 지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웃으시던 어머니. 그토록 그리운 당신이 곁에 있는 것 같다. 아니 저승에 계시지만 부르면 오실 것만 같아 크게 불러 보고 싶다. 어머니. 어머니...

이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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