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1921년 7월 23일, 중국은 50여 명의 소수가 모여 공산당을 창당했다. 그 작은 집단이 거대한 국민당을 쫓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것은 1949년 10월 1일이다.
기적의 배경은 스탈린을 전범으로 삼은 마오쩌둥이 계급투쟁을 앞세워 노동자와 농민을 우대하는 정책이었다. 스탈린이 7대 3으로 도시와 공업을 중시하고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는 등의 철권정책을 교훈 삼아 농업 중심의 중국에 맞게 역으로 7대 3의 정책을 추진했다.
농촌을 혁명의 기지로 삼아 부르주아 척결과 계급투쟁을 기반으로 한 평등사회 구축, 부의 균배를 이룬 공산사회를 제시한 것이다.
오랜 세월 착취당하고 억눌려 탈진상태에 빠진 노동자·농민들은 이상향 건설에 열광했고 국민당 관료들의 횡포를 막아주는 공산당에 매료되었다. 미국이 막대한 지원으로 힘을 실어주었는데도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쫓겨나기까지는 겨우 28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7대 3의 비율은 공산당 성장의 황금률이었다.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자 마오쩌둥은 공(功)7 과(過)3으로 스탈린의 이념적 공헌을 평가하며 그의 정책을 중국에 적용했다. 그 첫 번째 정책이 대약진 운동이었다. ‘7년 안에 영국을,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부푼 꿈은 3년 만에 30만여 명이 아사(餓死)하는 허언(虛言)의 결과를 빚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마오쩌둥은 1966년부터 사망하기 전인 1976년까지 10년 동안 문화대혁명을 전개했다. 학교를 폐쇄하고, 부르주아적 전통 가치를 파괴하는가 하면 관료들을 숙청하고 식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대약진 운동이 한창이던 1959년 3월에 많은 사람이 죽어간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인민의 절반이 죽게 내버려 두어 나머지 절반이 그들 몫을 먹을 수 있게 하는 게 낫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책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철저히 합리화를 내세운 것이다.
더구나 식량 증산을 위해 2억 천여 마리의 참새를 죽인 참새 박멸작전을 펼쳤는데 결과는 엉뚱하게 메뚜기와 해충이 창궐하여 아사자가 더 늘었다. 하는 일마다 인민을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40년이 지났는데도 자금성 천안문 앞에는 중국의 상징으로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중앙의 마오쩌둥 기념관에는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1981년 등소평이 마오쩌둥을 공(功)7 과(過)3으로 평가하여 논란을 잠재우고 영원한 국부(國父)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7대 3의 황금률은 아예 적용되지 않는다. 열이 좋다가 하나가 싫으면 그 열은 하나에 묻혀버려 질타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다. 색깔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색깔이 분명한 선명 노선만이 정치인 앞에 열려 있다.
국민 모두가 존경하는 정치인이 없다는 것은 모든 정치인이 욕을 먹는 대상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정치 혐오의 원인이다. 아웅산 국립묘지에 버어마의 모든 국민이 정성을 다해 참배하듯 우리도 국립묘지에 색깔을 초월한 존경의 참배가 이루어지는 날은 언제일까.
그런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우리 정치사의 비극이지만 황금률의 여유로 가슴이 열린 따뜻한 정치의 시대가 오는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
* 강기옥 문화전문 기자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강기옥 문화전문 기자
kangkk52@daum.net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