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신체에 일어나는 현상 중 세 가지 섭섭한 일이 있다. ‘재채기 나오려다 마는 것’, ‘방귀 참아야 하는 것’, ‘등 가려운데 긁지 못하는 것’이다. 생리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야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겠지만, 등 가려운 것쯤은 긁어버리면 그만인 쉬운 해결책이 있는 증상이다.
팔이 닿지 않으면 도구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증상이 병적인 수준에 이르면 소양증(搔癢症)으로 발전하여 치료를 받아야 한다. 쉬워 보이는 가려움증도 원인과 정도에 따라서는 의사를 찾아야 경우도 있는 것이다.
가려움증과 관련한 용어로 격화소양(隔靴搔癢)과 마고소양(麻姑搔痒)이 있다. 전자는 ‘신발을 신은 채 발을 긁는다’는 뜻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시원하지 않은 답답한 상황을 일컫는다. ‘머리가 가려운데 발뒤꿈치를 긁는다’는 두양소근(頭痒搔跟)과 같은 행위다. 그에 비해 후자는 손톱이 긴 마고선녀가 가려운 자리를 긁어준다는 뜻으로 모든 일이 쉽게 잘 해결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물론 마고 선녀에 얽힌 고사는 인간의 심리를 읽는 방평(方平)이라는 또 다른 선녀의 개입으로 인간이 꾸지람을 듣는 삽화도 있다. 그러나 소양(搔癢)을 소재로 이렇게 대조적인 교훈을 창안해낸 선조들의 지혜가 감탄스럽다.
요즈음 우리의 세태는 소양증을 해결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계층이 많다. 긁으려 노력해도 신발이 벗겨지지 않는 사회적 현상에 이르고 보니 아예 긁는 행위조차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그 낭패감은 마고 선녀와 같은 능력자들이 어려운 문제를 척척 해결하며 세상만사 뜻대로 즐기는 계층으로 인해 더 심각해졌다.
빈부 격차는 물론 신분의 격차로 심리적 소양증까지 겹친 것이다. 시원하게 토해버리고 싶어도 재채기는 콧구멍에서 맴돌며 간질이다 쏙 들어가 버리고, 방귀 한 번 시원히 해결해보고 싶어도 배앓이를 감수하며 참아야 한다. 그렇다고 등을 긁어줄 긴 팔도 없다. 아무리 몸을 꼼지락거려도 등줄기의 가려움증은 정도를 더할 뿐이다.
어린 시절에 들었던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다. 어린이들이 긴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상대방에게 먹여주는 곳은 천국이고, 자기 스스로 먹기 위해 자기에게 향하면 숟가락이 길어 먹지 못하는 곳은 지옥이란다. 지금 우리 사회는 천국인가, 지옥인가. 내 밥을 내 숟가락에 담아 스스로 지키려는 정치인과 경제인의 행태는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를 무상하게 한다.
분기별 대기업의 이익 발표나 고위급들에게 지급한 특별 성취금은 작은 가슴을 더 새가슴으로 오그라들게 한다. 생활자금이 없어 극한 방법을 택하는 자가 그 얼마인데, 근근한 삶에 골목 계단을 오르기도 힘든 자가 얼마인데 왜 그 많은 돈잔치가 TV 화면을 장식하는가. 아예 눈까풀을 긁어야 할 상황이다.
회사마다 이익의 얼마를 사회에 환원했다든가, 직원의 육아를 위해 사내에 유아원을 개설했다든가, 직업병의 위험이 있는 근로자를 위해 병원을 차렸다든가 등 목구멍이 시원할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어찌 그 많은 이익금이 정치인과 관련된 이야기만 맴도는지 가슴 시린 이야기에 귓불까지 긁어야 하는 소시민의 하루가 안타까운 현실이다.
정치인과 경제인을 포함한 사회 지도자는 화합과 상생으로 백성의 가려운 곳을 긁어줘야 한다. 선뜻 나설 수가 없다면 국민 스스로가 긁을 수 있도록 신발이라도 벗겨줄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과 지도자는 투사가 아니라 나라의 내일과 국민의 안위를 걱정하는 행동하는 양심이어야 한다.
TV에 나타나는 얼굴만 보고도 가려움증을 해결할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여야 한다. 밝은 내일의 꿈을 제시하는 지혜의 실천자여야 한다. 그래야만 힘 없고 돈 없는 민초들이 격화소양을 벗어난 등긁개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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