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마부작침(磨斧作針)으로 인간승리, 김병식 대표(‘우리기계’)그 비결은 지피지기(知彼知己), 붕우유신(朋友有信)
[시사앤피플] 이민영 기자 = 가정의 달을 맞이해 인간승리의 주인공 김병식 대표(67.우리기계)를 10일 만났다. 사업가로서 지옥과 천당을 경험한 그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아니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5월 가정의 달에 독자들에게 삶의 지혜를 전하는 마음으로 취재했다.
김 대표는 인생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마부작침(磨斧作針)의 정신으로 피나는 노력을 함으로써 실패한 사업가에서 다시 백만장자에 이르는 오뚜기 인생을 살았다. 젊은 시절 한 때 큰 고비를 거치기도 했지만 붕우유신(朋友有信)이란 오직 믿음의 처신으로 좋은 지인들을 만나게 돼 재도전의 기회를 갖게 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편집자 註)
김병식 대표(우리기계)는 35년 남짓한 세월 동안, 온갖 기계와 쇠덩이를 깎고 다루는 엔지니어로 살아왔다. 남들이 볼 때 쇠덩이를 다루기 때문에 쇠처럼 강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강할 땐 강하고 약해야 할 땐 마음이 여리다. 어쩌면 감수성이 참 풍부한 사람이다.
그는 CNC 터닝과 NC보링, 그리고 머시닝, 킹 슈퍼 보링 등을 많이 해 왔다. 주력 제품이 항상 신제품 신기술로 발전되기 때문에 끊임 없이 연구하고 기술을 연마하며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차근 차근 업계의 최고 기술을 갖게 됐다.
김 대표가 사회 첫 출발부터 기계를 다루진 않았다. 그는 군대 제대 다음 해인 1981년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취득 후 사우디아라비아 발전 운전공으로 리아드이맘대학교 건설 현장에서 5년 근무했다. 귀국 후 비디어 보급이 성황을 이루는 것을 보고 1986년 12월 비디오 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나 단순한 장사는 적성에 맞지 않아 1년만에 폐업하고 다른 길을 찾았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지인이 다니던 회사에 취직하게 됐다. 기계를 다루는 곳이었다. 이게 김 대표가 기계·쇠덩이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이다. 그는 이 때부터 적성이 맞는다는 것을 깨닫고 부지런히 관련 기술을 연마해 빠른 시일 내 숙련공이 됐다.
몇 년이 지나 숙련공이 된 그는 업계 최고 연봉을 제시하며 여러 곳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됐다. 다양한 기술을 배우기 위해 몇 곳을 옮기면서 자신감이 붙자 1991년 서울 양평동에 회사를 세우게 된다. 그렇지만 회사 운영이 처음일 뿐 아니라 자본금이 약하고 지인들이 없다 보니 회사 운영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사장이 돼 기분은 좋았지만, 기술이 최고라 해서 그것만 믿고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였다”고 회고했다. 실제 기업경영에서 기술은 그 중 일부이고 영업과 인맥, 금융관리, 각종 리스크 관리 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3년 정도 고생하며 회사를 운영할 무렵 운영비, 급료, 판공비, 세금 등 각종 지출금이 쏟아질 때마다 발행한 어음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고민하다 밤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당시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이 와중에 1997년 말 IMF 외환위기가 닥쳐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그는 부도를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알 수 없을 것이라며 대화를 이었다. 기계를 처분하고, 가정이 파탄났으며, 주위 사람들이 등을 돌릴 때 그 수모와 괴로움은 상상하기 조차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궁지에 몰리니 나는 극단적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순간도 있었다”며, 그는 “어느 날 한강 고수부지에 차를 몰고 달렸지만 그것(극단적 선택)마저도 내 마음 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하며 당시 정황을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 대표는 그날 밤새 술을 먹고 새벽 5시에 집으로 귀가하는데 그때 차가 많이 막혀 차안에 갇혀있는데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느낌이 왔다”며, 당시의 생각을 떨어놓았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아직 배울 것도 많고 그런데 요즘 인생을 너무나 무모하게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어려웠던 그 당시 그는 몸은 허약해지고, 다시 종업원이 되는 게 싫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다시 새 출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존심을 다 버리고 모 회사 사장의 요청을 받아 들여 그 회사에 입사하게 됐다. 그는 첫날부터 모든 이들과 전화도 끊고 술도 마시지 않기로 했다. 1999년 7월경 소위 잠수를 탔다. 그러니깐 1년 이상 방황 끝에 새로운 길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 회사에서 그는 11년 5개월 근무하는 동안 기술력을 인정 받아 매년 고액연봉을 받게 되고 가정이 안정돼 그동안 진 빚을 전부 변제했고, 34평짜리 아파트까지 장만했다. 그는 “이 때 나를 잘 봐준 그 사장에게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부재 중이지만 사의를 전했다.
김 대표는 “사업을 하다 보면 상대의 성격도 알게 되는데 대체로 지피지기가 중요하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게 되니 지혜의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며 그래서 “회사 사훈을 믿음, 신뢰, 절약으로 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고통 속에서 지혜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2010년 말쯤 회사를 혼자서 운영하던 때가 있었다. 그는 영업, 사무, 기계 운전, 납품 등 1인 4~5역을 하면서 새벽 4시 출근해 밤 11시까지 인간이 아니라 기계처럼 일했디. 그러면서 얻은 결론은 “마부작침, 끈질긴 인내와 피나는 노력 없이 승리는 없다”였다.
지내고 보면 인생이 세옹지마라 했듯 길흉화복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 항상 조심하고 숙고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그는 60대 후반으로 들어서며 체력이 떨어지자 이제 아침 5시 출근하고 조금 일찍 퇴근하는 패턴으로 지내고 있다. 책임감이 출중한 동생이 업무를 총괄하고 있어 항상 든든하다며 동생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였다.
그의 고향마을 김성중 씨(63)는 “어릴 적 부자집 장남이던 병식이 형은 성인이 돼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고난 속에서 터득한 삶의 지혜가 너무 값지고 소중하다”며 찬사를 이었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민영 기자
mylee06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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