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로고

[이승율 컬럼] 손 아무개가 기증한 마지막 작품

시사앤피플 | 기사입력 2024/06/20 [14:56]

[이승율 컬럼] 손 아무개가 기증한 마지막 작품

시사앤피플 | 입력 : 2024/06/20 [14:56]
본문이미지

▲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1.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대표작인 국보 '세한도(歲寒圖)'등 숱한 중요문화유산을 기증한 문화유산 수집가 손창근씨가 지난 11일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고인(향년 95세)은 세상을 떠나면서 문화유산과 땅을 기증했던 국립중앙박물관과 산림청에도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당부를 자식들에게 했고, 자식들도 그 유지를 따라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렀다고 한다.

언론에 따르면 손창근씨는 1929년 개성에서 태어나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개성의 부호였던 부친 손세기씨와 함께 광산업 등 사업을 했던 분이시다. 그는 2012년 경기도 용인의 임야 200만평(서울 남산의 2배 면적)을 난개발을 막기 위해 국가에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2017년 KAIST에 50억원 상당의 건물과 1억원을 기부했고, 2018년 '손세기·손창근 컬렉션' 기증식을 통해 '용비어천가' 초간본과 추사의 난초 걸작 '불이선란도' 등 문화유산 304점을 기증했다.

평소 남 앞에 나서거나 자신을 나타내기 싫어했던 손창근씨는 2018년 구순을 맞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여한 기증식에서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한 점 한 점, 정도 있고 애착이 가는 물건들입니다.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손 아무개 기증'이라고 붙여 주세요.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그 이상 인터뷰는 마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2020년 1월, 부친 손세기씨로부터 물려받은 보물 같은 작품 곧, "이것만은 섭섭해서 안되겠다"며 빼놓은 작품이 '세한도'였으나 끝내 마지막 한 작품까지 국가와 국민 앞에 내놓았다.

기부도 죽음도 알리지 말라고 했던 손창근씨! '손 아무개 기증'이란 한마디 말로 족히 자신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떠난 인물! 나는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그에 대한 기사를 읽고 '잠 못이루는 그리움' 같은 벅찬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2.
필자가 제주도 서귀포 대정읍에 있는 추사관을 탐방한 것은 약 9년 전인 2015년 여름이다. '세한도' 특별기획전을 한다고 해서 제주도 여행 중에 아내와 함께 갔었다.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분(손창근씨)의 배려로 영인본 전시를 했다. 제주 추사관은 추사 김정희가 유배되어 있었던 고장(서귀포 대정읍)에 2010년 문화재청에서 승효상 건축가를 지명하여 설계했으며, 총공사비 75억을 투입하여 건축한 역사문화기념관이다. 승효상씨는 김정희가 소나무 두 그루와 측백나무 세 그루 사이에 그려놓은 집 모양을 그대로 형상화하여 설계했는데, 그 건축선이 너무 단순하고 겉보기에 창고 같아서 지역 주민들이 불만스러워했다는 뒷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작가의 관점은 서로 교감하는 것일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램프웨이 주 출입구는 진입공간에서부터 추사의 歲寒(한겨울 추운 날씨)의 고난을 연상케 하듯 깊이 침잠하는 고립감을 느끼게 했다. 또한 인테리어 장식 요소와 기교가 절제된 4개의 전시실에는 '세한도' 외에도 기증 받은 김정희의 작품 1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어서 역사의 간극을 뛰어넘는 지혜와 학문의 깊이를 깨닫게 해 주었으며, 지하의 전시를 다 보고 나면 추사의 유배지로 가는 길이 연결 되어있는데 걸음을 옮길 때 마다 9년간(현종6년,1840-현종14년,1848)의 유배생활을 통해 짊어졌어야 할 인간적 고통과 외로움이 나 자신의 것인 양 감정이입 되어왔었다.

무지한 나 조차도 이러한데, '세한도'를 직접 본 중국과 조선의 문인들이 남긴 발문(跋文)과 찬문(贊文)을 살펴보면 그 깊은 우정과 의리, 덕을 숭상하는 인문학적 조예는 시대를 뛰어넘는 '거룩한 교감'으로 평가할만하다.

본디 '세한도'는 추사가 귀양 시절 제자 이상적(1804-1865)이 북경에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이라는 120권 79책짜리 서책을 구해와 유배지 제주도까지 가져다 준 그 제자도의 아름다운 절개와 섬김에 감동하여 자신의 처지(한겨울 추운 날씨와 같은 유배지)를 반추하면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그림이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치 않는 의리를 공자의 '논어' 자한(子罕) 편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에 빗대어 칭찬했으며, '장무상망(長毋相忘)' 인장을 찍어 서로의 우정을 늘 잊지 말기를 당부했다. '세한도'를 선물로 받은 이상적은 이 그림을 챙겨 들고 일곱 번째로 떠난 중국 출장길에 당시 친하게 지내던 청나라 문인 장요손(1807-1863)이 주최한 모임에 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이후 그 그림을 본 청나라 문인 16명이 '세한도'에 있는 송백(소나무와 측백나무)의 절개와 의기를 숭상하는 내용으로 감상 글을 적어 준 것이 댓글로 남아 있다.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준 '세한도'는 이후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이 소장하다가 그의 아들인 김준학에게 전해졌고, 이후 민영휘, 민규식이 소장했다가 1932년에는 경성제국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김정희의 학문적 성과를 최초로 연구한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의 손에 넘어 갔다. 그리고 그는 정년퇴임 후 '세한도'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안 진도 출신 서예가 손재형 씨(1902-1981)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여름에 도쿄에 있는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를 찾아가 석달이 넘도록 간청하고 또 그림값으로 거금을 지불한 뒤 '세한도'를 되찾아 왔는데, 이때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가 "지금까지 보인 그 정성을 보니 나보다 당신이 이 그림을 갖는 것이 더 좋겠다"라고 하면서 손재형 씨의 진정성에 탄복했다는 전설 같은 뒷얘기가 남아 있다. 손재형씨는 그 후 정계에 진출하면서 돈이 궁해지자 '세한도'를 개성 출신의 수장가인 손세기 씨에게 팔아 넘겼고, 그 후 오랜 기간 손세기 씨가 소장하던 그림을 아들 손창근씨가 물려받았다가 앞서 말한대로 2020년 1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그림이 그려진 지 176년 동안 여러 곳을 흘러 다니다가 마지막 피난처와 같은 박물관에 몸을 눕힌 '세한도'의 기구한 운명과 여정을 되돌아보면, 그 속에 어떤 냉혹한 찬바람이 불어 닥쳐도 꼿꼿이 절개와 의기를 지킨 송백(소나무와 측백나무)처럼 '세한의 고난'을 이겨낸 추사의 영혼이 지금도 변함없는 생기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낀다. 참으로 기묘하고 상서로운 그림이다.

#3.
13년 전인 2011년 봄에 추사 김정희와 그의 대표작 '세한도'를 소재로 시인 53명의 시 63편을 모은 '시로 그린 세한도'가 출간되었다. 과천문화원에서 출간한 이 책은, '문단의 마당발'로 통하는 시인 이근배(당시 69세)씨가 그동안 추사와 '세한도'를 기린 시를 유난히 많이 창작했다는 점에 착안, 수작들을 모아 펴낼 것을 제의해 이뤄진 일이다. 시집에 이름을 올린 시인에는 오세영, 서정춘, 유안진, 정희성, 조정권, 정호승, 황지우, 곽재구, 도종환씨 등이 포함됐다. 이들 가운데 몇 분의 시(詩)의 중요 부분을 찾아보았다

이근배 : ('부작란- 벼루읽기') 다시 '대정'에 가서 추사를 만나고 싶다/ 아홉 해 유배살이 벼루를 바닥내던/ 바다를 온통 물들이던 그 먹빛에 젖고 싶다(이하 생략)

유안진 : ('세한도 가는 길') (앞부분 생략)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 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이하 생략)

정호승 : ('뒷모습') (앞부분 생략) 내 뒷모습에 가끔 함박눈이 내리고/ 세한도의 소나무가 서있고/ 그 소나무에 흰 눈꽃이 피기를 기다려 왔으나/ 내 뒷모습에도 그믐달 같은 슬픈 얼굴이 있었다(이하 생략)

도종환 : ('세한도') (앞부분 생략) 폭설에 덮힌 한겨울을 견디는 모든 것들은/ 견디며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게 아름답다/ (중략)/ 발아래 밟히며 부서지는 눈과 얼음처럼/ 그동안 우리가 쌓은 것들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 대륙을 건너와 눈을 몰아다 뿌리는/ 냉혹한 비음의 바람 소리/ 언제쯤 그칠 것인지 아직은 예측할 수 없다/ (중략)/ 그대 이름을 불러 보리라/ 이 싸늘한 세월 천지를 덮은 눈 속에서/ 녹다가 얼어붙은 빙판이 되어 버린 숲길에서

그렇다면 수많은 시인들이 김정희의 '세한도'에 빠지고 심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안진씨는 '세한도'는 추운 계절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추위는 단순한 계절이 아닌 엄혹한 시대적 상황을 말한다고 풀이했다. 당시 반체제 인사로 유배되었던 추사가 언제 사약이 내려올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작품 제작에 몰두했듯이, "시인은 마땅히 세상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하는 유배의식을 가진 존재"라고 정의하면서 "춥고 서럽고 억울하고 분통 터지면서도 한 편의 시(詩) 쓰기에 매달린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추사의 삶과 예술에 대한 태도가 시인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기 때문에 추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블로그 '국어공부'에서 인용)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몇분의 시(詩) 가운데 도종환씨의 '세한도'에 있는 "견디며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게 아름답다" 라는 표현이 유배의식에 점철되어 있는 작가 정신을 가장 예리하게 드러낸 대목이라고 여겨져, 이 대목을 김정희의 처지(한겨울 추운 날씨의 유배지)와 공감하는 메타포로 이해하며 여러 번 숙독했다.

이렇듯 수 많은 시인들로부터 본보기가 되어온 추사의 '세한도'를 그 시인들 못지않게,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깊이 있게 사랑하고 인생의 귀감으로 삼아온 기업인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세한도'를 박물관에 기증하고 말없이 떠난 '손 아무개' 손창근씨다.

#4.
'손 아무개가 기증한 마지막 작품'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이다. 2018년 '손세기·손창근 컬렉션' 기증식을 통해 304점의 문화유산을 기증했을 때도 "이것만은 섭섭해서 안되겠다"며 빼놓았던 작품이다. 그토록 애지중지해왔던 그림을 2020년 1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을 때의 그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어쩌면 자기 수중을 떠나 멀리 외딴섬으로 유배되어 가는 자식같이 여겨지지는 않았을까? 또는 유안진 시인이 노래했듯이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 발로 뜨겁게 녹이며 가야 하는 길에 연인을 떠나보내는 심정은 아니었을까?

나 같았으면 도저히 멀리 자식을 유배시키거나, 닳고 터진 알 발로 연인을 떠나보내는 일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손 아무개' 그분은 그렇게 떠나보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유배지(?)로 '세한도'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이제 그 자신 마저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기부도 죽음도 알리지 말라... '세한도'처럼 떠났다“ 중앙일보 6월17일자 2면 '문화기부왕 별세' 라는 이슈 페이지 전면에 게재된 기사를 읽고 나는 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아! 우리나라, 우리 시대에도 이런 의인이 있었구나! 이 시대 최고의 덕목을 갖춘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평가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문화기부왕, 그는 내게 '초인(超人)의 기상'을 가르쳐 주셨다.

 

죽음조차도 알리지 말라며 죽음까지도 넘어선 거룩한 초인이시다. 그래서 '손 아무개'가 기증한 마지막 작품 '세한도'는 이제 김정희의 '세한도'나, 도종환과 유안진의 '세한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손 아무개'의 그림이요 시(詩)로 영원히 남아질 것이다. 그렇다. "손 아무개의 세한도" --죽어서 남기는 이름에 이 보다 더 명예롭고 값진 이름이 또 어디 있으랴!(출처 : 감격사회 6월 20일자 이승률 컬럼)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시사앤피플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