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위해 새집을 짓고 고선당(考先堂)이라는 당호로 낙성식을 가졌다. 울안에 대추나무와 단감나무를 심고, 정원에는 반송과 장미를 심어 전원의 풍경과 한옥의 정서를 최대한으로 살려냈다. 3년이 지나자 집안에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들이 피어났고 유실수들은 탐스럽게 세월을 담아냈다.
“꽃이 활짝 피었는디 어서 좀 와봐. 아까워 죽겄어.”
울타리에 심은 덩굴장미와 동쪽 정원의 장미가 활짝 피었나 보다. 객지에 사는 자식들은 찾아와야 자식이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보고 싶으니 좀 내려오라고 할 수 없어 꽃이 혼자 보기 아깝단다. 시적인 비유는 장미의 가시가 되어 가슴을 찌른다. 자식들 불편하게 할까봐 은근히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전통 시대의 모성이라면 뜸뜸한 전화로 안부를 대신하는 것이 요즈음의 자식이다.
장미만 보면 먼저 어머니가 생각난다. 얼마나 외로우면 장미를 견주어 보고 싶은 마음을 나타냈을까. 핑크빛 장미는 ‘행복한 사랑’, 하얀 장미는 '존경'과 ‘순결’을 상징한다. 뜰안의 장미는 색색을 다 갖추었으니 감동 그 자체다. 어머니에게 장미는 ‘사랑이 앞선 그리움’이었다면 내게 장미는 ‘그리움이 앞선 사랑’이었다.
장미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한국인에게 장미는 전혀 엉뚱한 의미로 출발했다. 설총이 화왕계(花王戒)에서 모란을 왕으로, 할미꽃은 백두옹(白頭翁)이라는 충직한 신하로, 장미는 요염한 간신으로 묘사한 것이다. 할미꽃을 허리 굽히는 충직한 남성으로 묘사한 것도 그렇지만 장미를 왕의 총기를 흐리는 가인(佳人), 즉 요녀로 묘사했다. 꽃을 우화하여 신문왕이 바르게 정치하도록 깨치기 위한 목적, 즉 꽃을 직관적 교훈의 대상으로 삼았다. 더구나 설총이 소재로 삼은 장미는 지금의 탐스러운 꽃이 아니라 고대의 거친 야생장미였다.
장미는 18세기 이전에 정원용으로 가꾸던 것을 고대 장미(old rose)라 하고 19세기 이후 정원용과 꽃꽂이용 등 절화용(折花用)으로 발전한 것을 현대 장미(morden rose)라 한다. 특히 하이브리드 장미(Hybrid Roses)는 교배종, 또는 잡종 장미로 요즈음 보는 대부분의 장미다.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전기와 가솔린 등 이종(異種) 에너지를 혼합하여 동력을 얻어내는 차를 말한다. 그전에도 hybrid animal(잡종동물, 노새), hybrid culture(혼성문화) 등과 같이 일반적인 용어로도 사용한 말이다. 식물계에서는 식량 증산을 위한 새 품종 개발과 장미와 같은 화려한 꽃 개발에 사용하는 용어다.
장미는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교류하기 시작했는데 이종 교배는 19세기에 들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의 원정이 문화에 끼친 영향을 보면 그 이전에 충분히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의 나침반과 화약 등이 유럽으로 건너가 더 큰 문화를 이루어 낸 것처럼, 서양의 문화가 동양에 젖어들어 더 아름다운 문화의 꽃을 피워냈다. 교류가 많은 문화가 더 윤택하듯 장미도 이종간의 교류가 많을수록 우수한 품종이 나타난다.
한 가지에 한 송이씩만 피는 것과 여러 송이가 피는 것, 병충해에 강한 것과 약한 것, 가시가 많은 것과 적은 것, 한 해에 한 번 피는 것과 두 번 피는 것, 단기간에 피는 것과 장기간에 피는 것 등을 교배하여 꾸준히 최상의 품종을 개량해내는 것이 하이브리드의 목적이다. 처음에는 한 나라 안에서 이루어지다가 유럽에서 다른 나라 품종과 교배를 시도하여 발전했으며 유럽종과 중국종의 교배로 확대되었다. 중국 장미와 영국 장미를 교배하여 얻은 Tea계 장미가 대표적인 경우다. 향기가 차꽃 향기와 비슷하여 Tea계 장미, 이것이 하이브리드계 장미의 조상이다.
하이브리드 계열의 장미가 귀족적이고 품위 있는 미인이라면 덩굴장미는 서민적이며 수더분한 이웃 아줌마다. 그중 덩굴장미가 동양적인 친근한 느낌을 주는 것은 담장을 중시하는 동양 집에서 울타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외부와의 차단 기능과 함께 안주인의 사람됨을 전하는 역할을 하면서 푸근하게 길손을 유혹한다. 큰 공원이나 정원, 또는 별장 같은 집의 정원에서 볼 수 있는 꽃, 양귀비와 같이 풍만한 아름다움과 고결한 느낌을 주면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위층, 부드러운 감성보다 이지적인 미를 풍기는 깔끔한 아가씨, 쉽게 말을 걸 수 없는 귀족적 분위기, 말을 걸면 톡 쏴댈 것 같은 도도한 표정, 이것이 하이브리드계 장미가 주는 느낌이다.
그에 비해 덩굴장미는 손에 든 보따리를 들어주며 어디까지 가느냐고 말 걸어 보고 싶은 이웃집 아가씨, 간편한 복장에 아기를 업은 내 아이의 이모, 시골길이나 도회지의 골목 어디서도 일상적인 이야기로 수다를 떨 수 있는 수더분한 아낙네, 쉽게 만나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친구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덩굴장미의 속성이다.
그 고운 꽃을 뒤로하고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머니를 위해 전지하던 가위질의 의미가 퇴색해버렸다.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혼자 보기 아까운 장미를 보면서 장미전쟁의 아름다운 결말을 회상한다. 30년의 전쟁으로 10만여 명의 사망자가 났지만 화해의 표상으로 만든 흰색과 붉은색의 혼합 장미문장을 만들었다. 두 가문의 화합을 상징하는 이 문양으로 인하여 영국은 국화를 장미로 결정했다.
우리도 노년은 붉은 장미, 젊은이는 하얀 장미로 상징하여 혼합의 장미를 남기는 아름다운 풍습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더불어 우리가 개발한 장미가 2010년 기준 185종에 이르며 해마다 새 품종을 개발하여 로열티 지불을 줄여가고 있다. 카네이션의 한계성을 벗어난 장미를 매개로 가족과 이웃을 사랑으로 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 강기옥 문화전문 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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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옥 문화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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