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삼 컬럼] 재벌집 막내아들과 초인(超人)의 빵
거지의 빵, 초인(超人)의 빵
시사앤피플 | 입력 : 2022/12/30 [12:08]
한국 전쟁 발발 후 상당 기간 미국은 한국에 엄청난 양의 밀가루를 원조했다. 흰쌀밥은 고사하고 보리밥도 없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를 배급했다. 어머니는 이 밀가루로 맛있게 칼국수와 수제비를 만드셨다. 그것은 천상의 맛이었고, 그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는 환상적인 기억이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9살 나이에 친가에 맡겨졌다. 금방 오시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은 공허한 신기루였고, 바람처럼 사라진 아버지의 뒷모습은 마지막이 되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나의 삶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학교도 못 가고 무임금 머슴살이를 했다. 하루는 소여물을 먹이다가 내 처지가 소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고픔과 서러움에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SPC그룹 창업주 초당(草堂) 허창성 전 회장은 일제 강점기가 끝나자마자 1945년 황해도 웅진에 상미당이라는 작은 빵집을 열었다. ‘상미당(賞美堂)’은 ‘맛있는 것을 주는 집’이라는 뜻이다. 허 전 회장은 남아도는 밀가루로 맛있는 빵을 만들어냈다. 그의 ‘맛있는 것을 주는 집’의 진심이 통했다. 상미당 정신은 삼립식품으로 이어져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허창성 전 회장은 “가장 맛있고 건강한 빵으로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이를 실현시킨 초인(超人)이다. 그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 맛있고 배부른 빵을 만들었다. 당시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행복한 빵이었다.
10살 고아에게 서울은 너무 차갑고 무서웠다. 1971년 당시 영등포에 많은 제빵 제과 공장들이 있었다. 김포공항 가는 길에 있는 현재 양화인공폭포가 있는 자리가 영등포 쓰레기 처리장이었다. 빵공장에서 버린 쓰레기 상자에는 빵 찌꺼기와 부스러기가 붙어있었다. 힘쎈 거지들이 1차, 2차 수거해가고 나면, 약하고 어린 내 차례가 되었다. 그야말로 눈물 젖은 빵 찌꺼기를 먹고 어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의 빵은 꿈에서나 먹을 수 있었던 고급 음식이었다. 특히 삼립식품의 크림빵은 너무 부드럽고 달아서 입에서 살살 녹았다. 추운 겨울, 유난히 추었던 겨울에 찜통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던 삼립호빵은 음식을 넘어선 사랑과 행복 그 자체였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먹을 것이 넘쳐나는 과잉의 시대이다. 다이어트가 21세기 최고의 철학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내가 아는 한 분은 지독한 ‘빵돌이’이다. 거의 평생 빵을 즐겼던 그는 당뇨병과 합병증으로 고약한 세월을 맞았다. 수차례의 수술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의 빵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투병 중에도 끝까지 빵을 끊지 못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다르게 빵은 건강에 좋은 음식이다. 쌀이 주식인 아시아인보다 빵을 즐기는 유럽인이 더 체격이 좋은 이유 중 하나가 건강한 빵 덕분이다. 우리는 쌀을 쪄 먹는다. 반면에 유럽인은 밀을 갈아 밀가루로 만들고 물과 섞어 발효시켜 빵으로 구워 먹는다.
발효는 신이 내린 선물과 같다. 탄수화물에 불과한 밀에 수많은 이로운 효소와 비타민과 미네랄들이 생성되는 기적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배추와 같은 풀떼기가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김치로 변신하는 것도 다 발효 덕분이다.
수출 역군으로 해외 출장을 정말 많이 다녔다. 세계는 넓고, 맛있고 건강한 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발효로 만드는 빵은 6000년간 인류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진 주식이다. 물과 효모와 밀로만 빚은 프랑스의 바게트와 깜빠뉴, 그리고 이탈리아의 치아바타가 대표적으로 건강한 빵이다.
그런데 건강과 생명의 빵이 21세기 한국에서 크게 변질되었다. 설탕과 인공감미료, 각종 화학첨가물로 범벅이 된 기형적이고 잘 썩지도 않는 소위 ‘미이라빵’을 만들어낸 것이다. 비약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건강하지 못한 빵을 먹고 있는 셈이다.
가끔 제빵점이나 편의점을 들르면 먹을만한 빵을 찾을 수가 없다. 건강한 빵을 고르는 간단한 방법은 “당뇨 환자도 먹을 수 있는가?”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거의 모든 빵은 혈당을 급격하게 올리는 ‘참 나쁜 빵’이 대부분이다. 중장기적으로 건강과 생명을 앗아가는 침묵의 살인자나 다름없다.
설탕이나 인공 감미료로 범벅이 된 탄수화물 덩어리 빵은 쾌락 호르몬 도파민을 마구 분비시켜 순간의 즐거움을 준다. 널리 알려진 대로 도파민 호르몬은 담배, 마약, 도박, 알코올 등과 같은 중독 물질에 의해 분비된다. 많은 사람이 제빵점과 편의점 빵을 먹는 순간 쾌락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길티플레저(Guilty pleasure,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에 불과하다.
허창성 전 회장이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도준(송중기)처럼 다시 환생한다면 그의 경영 철학처럼 ‘가장 맛있고 건강한 빵’으로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21세기 초인(超人)의 상미당(賞美堂)은 ‘건강을 주는 집’이 될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 근대화 과정에서 정말 다양한 일을 했고 커다란 성공과 실패도 맛보았다. “1% 실력과 99% 노력이면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권투에 도전했었고, 88올림픽 때는 부동산 투자로 상상도 못할 정도의 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평생 공돌이로 살았고 제조업과 수출에 내 인생을 바쳤다.
30년 전 육체가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건강과 행복에 관한 작은 통찰로 나 스스로 완벽에 가까운 건강을 얻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건강 제품을 개발해 중국 대륙에서 작지 않은 성공도 거두었다. 아울러 비영리법인 건강연구소를 설립해 나의 몫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업인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경제적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회사가 제공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이웃에게, 더 나아가 인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가?”라고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이 광야에 진짜 빵을 가져오는 초인(超人)을 목놓아 부른다.
* 이두삼 한국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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