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감염병사태가 끝나가고 있다. 첨단 생명과학을 활용한 RNA백신의 개발이 이번 사태를 제한된 희생으로 넘길 수 있게 된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집단면역에 의해 종지부를 찍게 되는 감염병사태의 역사적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일찍부터 점진적 집단면역 전략을 택한 나라들은 이제 감염자 수보다 경제지표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강력한 봉쇄정책을 지속하던 나라들도 속속 빗장을 풀고 있다. 이제는 감염병사태 이후를 내다 봐야한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면 모든 게 달라지듯이 감염병사태 이후의 세계가 그 이전의 세계와 같을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이다.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기술호황(tech boom)도 끝났다. 실리콘밸리를 주무대로 한 기술기업들이 끌어올린 주식시장의 호황이 끝났다. 인터넷, 스마트폰, SNS, 온라인유통 등이 주도한 변혁의 한 시대가 일단 막을 내리고 미래를 위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지금은 앞으로 올 일들을 생각해봐야 할 때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런데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어렵다. 경제예측을 예로 들어보자.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케인즈 이론을 토대로 한 거시경제 예측모델이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1955년 로렌스 클라인과 그 제자인 아더 골드버거가 함께 쓴 논문 「미국의 계량경제모델, 1929-1952 년」에서 제시한 클라인-골드버거 모델이다. 노동, 자본, 생산, 소비, 정부지출 등 경제의 여러 변수들간의 이론적 관계를 나타내는 방정식들에 과거에 실현된 변수들의 값을 입력하면 미래에 실현될 변수들의 값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게 예측모델의 기본원리다.
상당기간 동안 정교하게 발전된 거시경제 예측모델들은 1970년대, 1980년대에 와서는 잘 맞지 않게 되고, 주가변동 그래프처럼 간단한 도구보다 별로 나을 게 없다고 생각되면서 퇴조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성공한 예측모델도 있다. 일기예보는 10여년전만해도 잘 맞지 않았다. 거짓말쟁이는 기상청으로 보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큰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수퍼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단기적 일기예보는 상당히 정확해졌다.
경제예측은 실패했으나 일기예보는 일정 부분 성공한 것은 자연현상이 사회현상보다 단순하기 때문이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은 미래에서 살다 온 주인공이 족집게처럼 투자에 성공하여 자신의 목표를 성취해가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2020년대 한국에서 재벌의 존재이유가 되는 기능은 자산운용이다. 재벌은 경영보다는 투자를 위해 존재한다.
미래예측과 투자는 동전의 앞 뒷면과 같다. 예측은 투자를 위해 있고, 투자행위는 곧 예측행위다. 드라마에서 재벌가의 막내 손자인 주인공은 초인(superman)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로 돌아와 보자. 기술탈취 밖에 모르는 재벌들과 정부의 벤처정책자금을 위탁받아 안전한 사업에만 투자하는 자산운용자들만 있던 한국의 벤처투자자들 사이에서, 위험부담자본(risk capital)을 투자하는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 모델로 한국의 초기회사(startup) 몇 개를 유니콘으로 키워낸 투자자와 대화한 적이 있다.
그의 투자철학에 있어서 한 가지 신조는 겸허함이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더니,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해야지, 안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투자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역설적이지만 미래의 예측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겸허한 투자가 성공 확률이 높은 투자다. 투자는 미래를 만드는 행위다. 경제현상이 물리적 현상보다 예측하기 힘든 것은 더 복잡해서만은 아니다. 인간의 행위가 미래를 바꾸기 때문이다.
투자행위가 경제의 미래를 바꾼다. 입체사진술인 홀로그래피를 발명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데니스 가보어는 1963년에 쓴 저서에서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발명될 수 있다고 했다. 혁신적인 발명품들을 세상에 내놓는 실리콘밸리의 창업가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는 문구다. 발명이 미래를 바꾼다는 얘기다. 발명이 미래를 바꾸려면 투자가 있어야 한다. 투자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비전이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비전은 의지가 투영된 미래예측이다. 미래예측이 미래를 바꾸는 셈이다. 이 되돌이구조(reflexivity)는 한 때 철학을 공부했던 투자자 조지 소로스가 경제현상에 대해 얘기할 때 거론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 물리학자들은 인식이 현상을 바꾸기 때문에 우리는 현상을 본질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 감염병사태와 기술호황이 끝난 뒤 전개될 세상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겸허한 마음으로 미래를 만들어갈 뿐이다.
* 채수찬 경제학자 • 카이스트 교수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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