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범 컬럼] 착한 사람, 만만한 사람
시사앤피플 | 입력 : 2023/02/22 [07:53]
[시사앤피플]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고 전율을 느꼈다. 전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킨 <오징어게임>보다 더 재미있었고, 감정이입이 잘 되었다. <더 글로리>는 앞으로 전 세계인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드라마를 관통하는 ‘폭력과 복수’ 키워드는 시청자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나도 이 주제에 관해 거의 평생 고민했기 때문에 드라마를 몇 번이고 시청했다.
나는 초4에 6살 터울의 형과 두 살 많은 작은 누나와 함께 서울에서 자취하게 됐다. 꿈에 그리던 서울 유학을 하게 되었지만, 첫날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형에게 매일 혼나고 매를 맞았다. 나중에는 형은 단지 유희를 위해서 어린 동생과 강제로 권투를 했다. 말이 권투지 일방적으로 매일 두들겨 맞았다.
물리적 폭력보다 더 상처를 줬던 것은 언어폭력이었다. “너는 커서 감방에 갈 거다.” “깡패도 못될 X이다.” “실속이 없다.” “새가슴이라 커서 양복도 안 어울릴 거다.” 등의 말로 어린 소년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무서운 것은 이 말들이 가족 모두를 세뇌했다. 형은 장남이었고 집안에서 절대적인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중2 때 형에게 처음으로 “나중에 커서 내가 복수하면 어쩌려고 이렇게 때려?”라고 대들었다. 그날 너무 맞아 한참을 기절했었다. 하지만 이후 형은 단 한 번도 나를 때리지 못했다. 해방되었고 자유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고삐 풀린 망나니처럼 미친 듯이 놀았고, 당연히 성적은 바닥이었다.
일 년 뒤 나는 고입 시험에 떨어졌다. 죽고 싶을 정도의 수치심으로 치를 떨었다. 내 인생이 형의 예언처럼 될까 봐 너무 두려웠다. 1982년 고입 재수를 했고, 이후 학문적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더 글로리> 주인공 문동은(송혜교 분)은 박연진, 전재준, 이사라 등의 학교 폭력으로 자퇴하고 공장에 다니며 복수를 꿈꿨다. 주경야독으로 교대에 입학하고 선생님이 된다. 20여 년에 걸쳐 치밀하게 준비한 문동은은 통쾌하게 복수를 실행하며 시청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 “나 지금 되게 신나, 연진아!”라고 말하는 문동은은 과연 행복할까?
세상은 넓고 나쁜 사람은 많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상처받았다. 특히 가장 가깝던 사람들에게 당한 배신은 아픔이 정말 컸다. 그들에 대한 나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나름 처절하게 응징과 복수도 했다. 엄청난 도파민이 분비되고, 마약처럼 중독성을 가진다. 문동은의 말처럼 복수는 되게 신난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져 가해자를 직접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기도 했다. 힘들 때는 종교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배신뿐이었다.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쓰고, 그들은 ‘만만한 사람’으로 읽은 것이다.
우리 집 반려견 뚜봉이를 매일 산책을 시키고, 먹이도 건강식만 정성스럽게 준다. 그런데도 조금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으르렁거리거나 물기도 한다. 그게 짐승의 본질이다. 자기 먹이 앞에서는 주인이고 집사고 다 소용없다. 한마디로 배은망덕이다. 그런데도 뚜봉이를 사랑하고 아낀다. 짐승에게 ‘인간다움’을 기대 안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전전두엽 피질이라는 인간의 뇌 덕분이다. 이성적 판단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전전두엽 피질 덕분에 인간은 이타적이고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인류는 전전두엽 피질 덕분에 위대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즉 우리 초기 조상은 모두 이타적이고 사랑이 넘쳤다. 남의 음식이나 아내를 뺏는 이기적인 초기 인류는 모두 도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수많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기적이고 공감력이 떨어지는 극단적인 경우는 연쇄살인마와 같은 사이코패스이다. 이들의 전전두엽 피질은 선천적으로 훼손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거의 짐승과 같은 수준이다. 오로지 포유류의 뇌, 변연계만 발달했다. 연쇄살인마는 피해자 죽음의 고통보다는 자기 손에 난 작은 상처를 더 아파한다.
학교 폭력, 가정 폭력, 군대 폭력, 직장 폭력 등의 가해자는 대부분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진 소시오패스이다. 이들은 전체 인구의 4%를 차지하고,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자신의 성공이나 재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이다. 하지만 양의 탈을 쓰고, 피해자나 환경 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한다. 심지어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소시오패스는 강자에게 비굴할 정도로 아첨한다. 반면 여자, 아이, 노인, 장애인, 종업원, 성소수자 등 약자에게는 물리적, 언어적, 성적 폭력을 거침없이 행사한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너무 약한 존재이다. 대부분 자존감이 밑바닥이고, 시기와 질투로 똘똘 뭉친 부정적인 사람이다.
가해자에게 복수하면 개과천선을 하고 용서를 빌까? 절대 아니다. 가해자는 자신이 과거에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또한 자기 잘못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들에게 진정한 사과를 받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그러니 완벽한 복수에 성공해도 남는 것은 공허한 마음뿐이다. 복수의 ‘신남’은 결국 피해자 자신의 영혼을 난도질한다.
그렇다면 가해자들을 직접 용서하는 것은 어떨까? ‘한번 연진은 영원한 연진’이다. 용서한다고 그들의 악한 동물적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가해자는 절대 고쳐 쓸 수가 없다. 결국 또다시 그들에게 상처받을 확률이 99.9%이다.
내가 아동 폭력에 시달릴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심지어 부모님조차 ‘맞을 만하다’라며 장남을 옹호했다. 결국 나 스스로를 탓하고 자책하며 지옥에서 살았다.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20대부터 20여 년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용서는 피해자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연민과 사랑으로 상처받은 자신을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야 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자신에게 위로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하루 10분 명상이나 복식호흡으로 상처받은 영혼을 달랠 수 있다.
후천적으로 인간의 뇌가 손상된 소시오패스는 ‘인간다움’을 상실한 사실 불쌍한 존재이다. 그런 사람은 복수할 가치도 없다. 가해자에게는 분노와 복수의 감정 대신 측은지심을 보내면 된다. ‘비 맞은 강아지’를 바라보는 그런 감정이면 족하다.
공감 능력과 사랑이 거의 없는 가해자는 성공하더라도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 경험상 악인은 어떤 형태라도 자기 죗값을 치르게 되어있다. 인류는 430만 년의 진화 과정에서 사악한 이기주의자를 응징해왔다. 그런데 굳이 내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있을까?
가장 아름다운 복수는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가해자보다 도덕적 우위에 서면 그는 지옥에 빠지게 한다. 행복한 피해자를 보는 것만큼 가해자를 불행으로 빠뜨리는 것은 없다. 예컨대 어릴 적 찐따라고 생각해 폭력을 가했는데, 나중에 그가 슈바이처 박사나 테레사 수녀와 같은 성인(聖人)이 되었다면 가해자는 어떻겠는가? 그날부터 모든 날이 흉흉할 거다.
나 지금 되게 행복해, 연진아!
* 한승범 한류연구소장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