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0대초 남달리 박력이 넘쳤고, 나름대로 예리한 분석력으로 마포에 빌딩을 건축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주변의 우려가 많았지만 미래 가능성 하나만으로 흔들림 없이 이를 추진했다.
그 때 예비 작업으로 임직원들과 심도 있는 토론과 논의를 거쳤고, 닥쳐올 어려움은 당연한 과제라 여기고 그 하나 하나를 헤쳐 나갈 방도를 강구했다. 임직원 누구의 의견도 무시하지 않고 동의를 얻어낼 때까지 설득과 인내로 소신 있게 밀고 나갔다.
『三國志』에서 조조曹操가 “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는다(逢山開道 遇水架橋)”는 경구를 염두에 두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마침내 임직원 만장일치로 이 일이 통과되자 뜻한 바를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 당시 마포의 빌딩으로서는 큰 규모였다. 지하5층, 지상15층 도합 20층 건물로, 토지 매입에서부터 인허가를 거쳐 착수와 준공에 이르기까지 많은 난제들을 극복하면서 건물의 정초(定礎)를 이루던 날은 생애 처음 맛보는 희열로 지금도 그때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 결과물은 마포가 가지는 미래 가치와 이에 따른 철저한 준비, 임직원과 격의 없는 소통이 일궈낸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마포(지금의 공덕동 로타리)의 가치는 역사가 증명했다. 마포는 지리학상 포구 문화가 일찍부터 번성했다. 조선시대부터 근대 역사에 이르기까지 마포나루(지금의 토정동, 마포동일대), 서강나루(지금의 신정동. 하중동,상수동 일대), 양화나루(지금의 절두산 서쪽부근)가 있었고, 빼어난 경치로 일찍이 ‘마포 8경’ 이라 일컬어 왔다.
마포지역은 안산(案山)에서 갈라진 와우산 구룡산맥과 노고산 구룡산 구룡산맥이 강으로 뻗었으며, 세 산맥 연안에 호수처럼 발달한 서호, 마포, 용호, 이것을 3개 포구라고 불렸고, 이중에서 지금의 마포를 마포강, 마포항, 등으로 불려 마포라는 명칭이 유래 됐다.
조선후기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1691~1756)은 “이곳(마포)은 한강을 따라 강선(江船)이 왕래하는 지역으로 바다와 산지의 이익을 챙기고 동쪽과 서쪽의 한강에서 사람과 화물을 배로 실어 나르는 데 따르는 이익을 독차지하고 있다”라고 기술돼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동쪽은 동호대교를 서쪽은 서강(西江), 곧 마포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서강대학교의 유래이며, 당시 마포는 상업의 중심지로 조선의 부(富)가 집결된 곳이었다. 지금의 여의도는 우리나라 금융의 메카로 여기에 증권거래소가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처럼 마포의 조선시대의 전통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울의 관문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필자는 공덕(孔德)역을 공덕(功德)으로 느끼며 지내와 좋은 이미지를 가졌다. 그래서 공덕동 로타리에 위치한 마포 제일빌딩은 재개발로 탄생시켰다.
이 빌딩은 공항 귀빈로라는 대로변 5거리 중심지에 위치해 대문짝만한 간판이 있어 유명해 지기 시작했다. 또한 동교동계, 상도동계 정치인의 집결지가 되다 보니 정치1번지가 됐다. 당시 서슬 퍼런 공안정국에 비추어 우리 회사는 자연 정치 탄압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이후 김영삼, 김대중 대선 후보가 이 빌딩에서 문민정부에 이어 국민의정부로 탄생해 이 빌딩은 명당 건물이 됐다. 필자는 이 건물주로서 이러한 보람과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
이후 여의도 빌딩에서 나라의 지도자가 탄생하는 지역으로 발전해 갔다. 세월의 무게 속에 마포를 회고하니 젊은 시절 패기 하나만으로 도전했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대선이 지나니 마포의 영화가 여의도로 전해져 훌륭한 국가지도자가 리더십을 발휘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 다시 대선이 돌아온다면 나의 마포에 얽힌 추억과 체험적 정신 세계는 리마인드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정홍술 컬럼니스트(수필가)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시사앤피플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