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지금까지 가장 감명받았던 작품은 박경리의 <토지>이다. 대하소설 <토지>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만약 <토지>가 영어로 제대로 번역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 반열에 오른다고 확신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파트2가 개봉 사흘 만에 전 세계 1위에 등극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간절하게 기다렸던 드라마였고, 김은숙 작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전 세계인을 사로잡는 한류의 근본은 스토리이고, 그 중심에 김은숙 작가가 있다. <더 글로리>는 드라마가 아니라 위대한 작품으로 역사에 남을 가치가 있다.
<토지>나 <더 글로리>가 위대한 것은 작품 속에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표현은 나와 같은 범인을 일깨워주고, 더 나은 인간으로 살게 만들어 준다.
<더 글리리>에서 폭력과 상처,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가 다소 과장되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컨대 드라마 최고 빌런 박연진(임지연 분)이 가하는 잔인한 폭력이 비현실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폭력에 대해 전혀 죄의식을 못 느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비판도 있다.
나는 초4부터 형, 작은누나와 함께 서울에서 자취했다. 5년 동안 거의 매일 형에게 맞았다. 더불어 언어폭력과 성적 학대도 당했다. 집안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형은 신과 같은 존재여서 어린아이는 아무런 반항도 못 하고 매일 지옥에서 살았다. 부모님도 나를 외면했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어린이는 인간으로서 존중하여야 하며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라는 어린이 헌장은 매 맞는 어린이에게는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가장 깊은 상처는 엄동설한에 형이 내 옷을 벗기고 집 밖에서 벌을 세운 것이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보다 옆집에 사는 같은 반 여자애가 알몸인 나를 보는 것이 더 무서웠다. 그때 형은 작은누나와 부엌에서 밤을 구워 먹고 있었다.
나에게 5년은 잃어버린 시간이라 사실상 학대 외에 다른 기억이 거의 없다. 몇 년 전 혜화초 동창회에서 나를 기억하는 한 친구를 만났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적이 있다고 말하길래 나는 그때 형에게 매를 맞고 학대당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내가 거짓말한다고 했다. 그렇게 자상하고 착한 형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형은 우리 가족한테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남에게는 그렇게 순한 양처럼 행세한 것이다. 방구석 여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형의 학대는 5년만 지옥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학대의 트라우마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나를 지배했다. 항상 주눅이 들었고 자신감이 부족했다. 학교에서는 열등생, 군대에서는 고문관 취급받았다. 분노조절장애, 우울증, 알코올중독, 그리고 성적 도착증 등으로 20대부터 20년 넘게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40대 중반에는 120kg이 넘는 초고도비만이 되었고 온갖 성인병으로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더 글로리>에서 박연진은 마지막 속죄의 기회를 주겠다는 문동은(송혜교 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잘못한 게 없어 동은아! 전혀! 네 인생이 나 땜에 지옥이라고? 지랄하지 마! 네 인생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지옥이었잖아! 넌 외려 나한테 감사해야 해! 내 덕에 선생도 되고, 이 악물고 팔자 바꿀 동기 만들어 준 게 죄냐? 용서? 누가 누굴?”
나는 이 장면에서 소름이 돋았다. 김은숙 작가는 학폭 피해자에게 진심이었다. 그는 폭력 가해자의 추악한 본성을 낱낱이 꿰뚫어 본 것이다. 수십 년도 지난 폭력으로 인해 왜 피해자들이 지금도 고통받는지 시청자에게 알려준 것이다.
1997년 모스크바에서 유학 중일 때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을 위해 홍제동에 건물을 사셨다며 “네 형이 건물주가 됐다, 형수에게 이제 당당하게 됐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셨다. 전화를 끊고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다. 우리 집 재정으로 감당이 안 되는 건물을 은행 빚으로 사면 내 유학 비용은 끝장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와 가족은 차디찬 모스크바에 알몸으로 버려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몇 달 뒤 IMF 외환위기마저 터져 한국에서 단 1달러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갓 돌이 지난 아들을 보니 하늘이 막막했다. 졸지에 ‘월남의 보트피플’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온갖 제품을 내다 팔고 버티다가 통번역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갔다. 목숨을 걸고 일했더니 하늘도 감동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2000년 어머님 사정은 더욱 악화하여 운영하시는 포목점이 사실상 망한 상태가 되었다. 부모형제의 어려움을 나몰라라 할 수 없었다. 컴맹이었던 나는 모스크바에서 독학으로 3개월 공부해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당시에는 생소한 온라인마케팅을 펼쳐 최대 포털사이트 야후코리아에 한복 검색 순위 1위를 만들었다. 10월 매출이 1억이 되었다. 이후 13년간 내가 부모님에게 적지 않은 돈을 벌게 해주었다.
2008년에는 부모형제를 위해 한양대 연구교수직을 버리고 한복대여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다. 이때 아내는 나와의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나중에 털어놨다. 아내가 한복 디자인을 전담했고, 경영은 내가 맡았다. 하지만 효심과 존경의 의미로 어머님의 함자를 브랜드명으로 사용했다. 3년 만에 한복대여 브랜드 1위로 만들어 부모형제 모두 행복하게 만들었다. 부유한 큰 누님을 포함한 모든 가맹점주가 2억 가까운 가맹비를 냈다. 하지만 어려운 형과 작은누나, 그리고 부모님에게 사실상 공짜로 가맹점을 내주었다. 월수입이 1,000만 원이 넘는 노다지 프랜차이즈 가맹점주가 된 것이다. 형에게 이덕보원(以德報怨) 즉, 덕으로 원수를 갚았다.
하지만 사업이 한창 잘될 때 아내가 나에게 어머님 말씀을 전했다. 동생 밑에서 가맹점주를 하는 장남 모습이 안쓰러워 나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넣자는 것이다. 그리고 형을 대표이사 시키자고 며느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믿기지 않아 어머님에게 확인하니 내가 말을 안 들어 그랬다는 것이다. 그날 너무 울었다.
나는 형을 빛내기 위한 하나의 머슴에 불과했구나. 내가 빛이 나면 안 되는 거구나. 돌이켜보면 내가 착해서 어머님과 집안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님이 형을 위해 짠 판에 내가 제대로 들어온 것이다. 어머님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어릴 적부터 착한 척 아등바등하였다. 참으로 아련하고 불쌍하다.
승승장구하던 프랜차이즈 사업은 일 년 뒤 풍비박산 났다. 나는 10억이 넘는 부채를 안고 파산했고, 완벽한 알거지가 되었다. 이때 120kg이 넘는 초고도비만에 온갖 성인병과 정신병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내 아들 고등학교 등록금도 못 내는 상황이었다. 내 도움으로 13년간 잘 먹고 살고, 집까지 챙긴 형과 부모님은 나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또다시 내 옷을 벗긴 것이다.
<더 글로리>에서 딸의 교사직을 그만두게 한 엄마에게 문동은은 “고마워 엄마, 하나도 안 변해서, 그대로여서”라고 말했다. 어머님이 나를 정신병원에 감금하려고 했을 때 비로소 해방되었다. 어머님을 향한 나의 애틋한 사랑의 탯줄이 비로소 끓어진 것이다. 진실로 어머님의 본모습을 알게 돼서 고마웠다. 하지만 부모님과 형은 ‘오리의 배’를 너무 일찍 갈랐다는 것을 몰랐다.
2014년 45kg을 6개월 만에 감량하고 모든 병을 치유했다. 전혀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다. 일 년 만에 새로운 사업에서 화려하게 재기하였다. 부모형제와 의절하고 살다가 3년 전 모두에게 내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물론 누구도 나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긴급하게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하게 된 어머님을 위해 마사지 비법을 알려드려 3개월 만에 고쳐드렸다. 자식 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연진이처럼 어머님과 형의 폭력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아동 폭력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네가 워낙 지랄맞아서 사람 되라고 때린 것이다. 형이 때려서 네가 사람이 됐고, 형 덕분에 이렇게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형을 사람 만들면 안 되나?”란 생각도 든다. 원초적 폭력보다 2차 가해가 훨씬 아프고 쓰라리다. 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최근에 형은 작은누나가 음식을 잘못 만들어 영양실조 걸려 정신이 안 좋았고, 그래서 나를 때렸다고 말했다. 초6 어린 소녀가 오빠와 동생을 위해 6년간 밥을 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비난한 것이다. 어머님 강압에 의해 부엌데기로 아름답고 빛나는 소녀의 시간을 상실한 누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 말을 듣고 실소를 금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 형은 혼자 콜라를 마시다가 추접스럽게 쳐다본다고 어린 우리를 때렸었다. 그런데 영양실조라니, 참으로 신박한 변명이다.
피해자들이 수십 년이 지나 갑자기 학교폭력 사실을 폭로하는 것은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삼자 입장에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피해 당사자는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김은숙 작가가 말하듯이 피해자가 폭력으로 잃어버린 영광과 명예를 찾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가 필요하다. 하지만 진심어린 사과할 정도의 인격을 가졌다면, 애당초 그런 무자비한 폭력은 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폭력 가해자는 대부분 전전두엽 피질에 문제가 생긴 사람이다. 예컨대 맹자의 성선설처럼 우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전전두엽 피질이 손상된 사람은 측은지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바로 전전두엽 피질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손상된 사람은 ‘인간다움’을 상실한 짐승과 같은 상태이다. 공감력이 떨어지고, 자기만 아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이다.
가정 폭력, 학교 폭력, 군대 폭력, 직장 폭력 가해자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떨까? 그들이 진심어린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대부분 ‘진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번 연진은 영원한 연진’이다. 전갈과 개구리 우화가 가장 적절한 예이다. 전갈을 등에 태워 강을 건너는 호의를 베푼 개구리는 독침에 찔려 죽는다. 같이 죽음을 맞이한 개구리에게 전갈은 “나는 전갈이야. 그게 내 본성이라고”
용서는 피해자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연민과 사랑으로 상처받은 자신을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야 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자신에게 위로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세상에는 <더 글로리>의 보건교사 ‘정미’와 같은 훌륭한 사람도 존재한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 자신의 아픔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상담받는 것도 좋다.
그리고 일기나 SNS, 혹은 책을 통해 과거의 폭행과 아픔에 대해 밝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오프라 윈프라는 어릴 적 사촌오빠와 삼촌에게 성폭행당하고 임신까지 했다. 그는 나중에 용기를 내어 방송과 책을 통해 자신의 치부를 세상에 알렸고, 스스로를 치유하고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다.
가장 아름다운 복수는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가해자보다 도덕적 우위에 서면 그는 지옥에 빠지게 한다. 행복한 피해자를 보는 것만큼 가해자를 불행으로 빠뜨리는 것은 없다. 예컨대 어릴 적 찐따라고 생각해 폭력을 가했는데, 나중에 그가 오프라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면 가해자는 어떻겠는가? 그날부터 모든 날이 흉흉할 거다.
김은숙 작가는 <더 글로리>를 통해 상처받은 전 세계 폭력 피해자에게 위로의 노래를 들려준다. 무당의 죽음을 통해 신이 가해자를 불행으로 이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는 펜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가야 할 길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지난 50년간 겪었던 몸과 마음의 아픔과 치유를 통해 적지 않은 통찰을 얻었다. 앞으로 50년간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을 펜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다. 그것이 신이 내게 내린 명령이고 나의 숙명이다. 연진아, 이 옷 벗어서 너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