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위기’라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쓰인다. 지금과 같은 저출산 추이가 지속되면 대한민국이 소멸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러한 ‘위기론’은 인구 변화 현상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그에 따라 우리 사회가 적절하게 대응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변화를 막고 갈등을 부추긴다.
한국사회에서 위기가 아니었던 때는 없었다. 적어도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위기’라는 말을 해 오면서 일관되게 발전주의 전략을 추진해 왔다. 위기 강조는 보통 그 문제를 직시하고 풀기 위한 맥락에서 제기되기보다 기존 체제의 변화를 막으려는 목적으로, 변화 비용을 사회화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경우가 많았다.
기존 방식의 성장사회를 전제한 오늘날의 위기론도 성격이 그리 다르지 않다. 위기론의 근거로 제시되는 장기 시나리오도 특정한 시각을 전제로, 현 상황의 지속을 가정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기보다는 성장에 대한 일면적 이해에 근거해 막연한 공포감을 조장한다.
출산율 저하 경향을 추동한 것은 ‘발전주의’라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체제였다. 발전주의라는 말을 꼭 비판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GDP 증가와 사회이동으로 요약되는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보고자 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한국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세계 평균으로 보면 합계출산율은 1960년대 후반과 1980년대 후반 두 시점에서 두드러지게 하락했다. 첫 번째 시기에서 경구 피임약 보급이 출산율 하락의 주요 요인으로 꼽히지만, 근본 요인은 발전주의 체제의 세계적 확산이었다. 서구가 제시한 발전 전략에서 핵심은 인구억제였고, 그 수단으로 가족계획이 세계 곳곳에서 시행되었다.
1980년대는 냉전 체제가 해체되면서 국제이주 양상이 급변했던 시기다. 발전주의 체제 확산의 제2물결의 시기였다. 이들 두 차례의 발전주의 확산으로 전 세계적으로 개인당 평균 출산아 수는 줄곧 줄어 왔다.
발전주의 원리의 구성 요소는 생산성, 경제적 합리성, 계산가능성 등의 가치와 관련 있다. 이러한 가치체계에서 생명은 생산성 있는 노동력으로 통제되고, 관리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기 쉽다. 돌보고, 살리는 활동이 우선순위가 될 수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발전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한다. 발전주의라는 사회조직의 원리가 바뀌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추이는 지속될 것이다.
이른바 저출산 대책도 발전주의의 맥락에서 제시되고 있다. 성장 시대의 인구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기계적인 대책을 나열하는 데에 집중한다. 저출산의 근본 맥락이 자본주의 체제 심화에 따른 경쟁 강화와 그에 따른 생명의 도구화인데, 지금의 출산장려대책은 생명 현상에 여러 조건을 부과함으로써 출산을 합리적 계산 대상으로 보게 하는 관점을 강화하고 있다. 국가와 사회가 출산을 강조하면 할수록 인간을, 생명을 도구적으로 보는 프레임이 강해질 것이다.
국가를 위해 아이를 낳으라는 말은 과거에도 통하지 않았던 말이다. 국가를 위해 아이를 덜 낳았던 것이 아니다. 아이를 덜 낳는 것이 가족과 사회의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덜 낳았던 것이다. 여러 연구가 지적하듯이 가족계획정책은 아이를 적게 낳는 경향을 촉진했을 뿐 추이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인구를, 생명을 여전히 생산인구나 부양인구로, 인력 문제로만 생각한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논의하지 않고 무턱대고 인구절벽이니 인구소멸이니 하는 말로 사람들의 욕망과 두려움을 부추긴다. 한편에서는 개인주의적 논리가 국가화된 담론을 냉소하고 있다. 출산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말로, 출산은 비용이고 부담이라는 말로 출산 행위를 전적으로 개인화된 계산의 영역으로 규정하는 분위기도 만만찮게 있다. 이러한 담론 구도에서 아이를 낳는 일은 애국이 아니면 개인의 삶의 질 문제가 되어 버렸다. 둘 모두 공유하는 전제가 있다. 계산화된, 도구화된 논리로 출산을 본다는 것이다. 기존의 두 관점 모두 돌봄 관계에서의 불평등이나 부정의를 근본적으로 직시하지 못한다.
두 관점 모두에서 빠진 것은 사회에 대한 어떤 상상력이다. 생명을 도구적 대상으로 보는 것에서 탈피해 생명을 보살핀다는 관점에서 보편적인 정책의 논리를 상상해 보면 좋겠다. ‘취약한 생명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 ‘서로 돌보는 사회관계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정책적 상상을 해 보았으면 한다. 많은 정책이 경쟁을 강화하려는 관점에서 시행되고 있다.
대상자들에 한정한 현금 지원을 주된 도구로 한 출산 정책은 더이상 보편 정책도 아닐 수 있다. 특정 맥락에서는 불평등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더욱 많아질 출산하지 않은 이들의 동의를 얻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정책의 메시지를, 지원의 메시지를 생명 도구화에서 생명 존중으로, 경쟁력 강화에서 연대감 강화로 바꾸어 담아낼 필요가 있다.
인구정책이라는 것을 말할 수가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응 정책이고, 기획 정책이다. 인구 현상 변화의 함의는 태어나고 죽는 문제의 사회적 성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인구 이야기가 넘치지만 인구 구조의 상세 내용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다. 총량에 집중하기보다 분포와 구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구를 조작하려는 데에 힘을 쏟기보다는 인구 현상이 시사하는 의미를 충분하게 고민하고 그에 따라 사회를 어떤 식으로 조직할지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환의 과정을 어떻게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 것이냐에 지금보다 더 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요한 인구학적 작업은 기존 질서나 규범을 전제한 규범적 예측보다는 현상적 관측이다. 역사적, 비교사회적 시각에서의 장기 추이 분석이고, 구체적인 맥락에서의 중단기 예측이다.
생산인구 중심의 연령-역할-규범 체제를 다시 짜는 문제는 기존의 틀을 고수하는 한 혼란과 불안 요인이겠지만 성장과 공급, 확충을 목표로 숨 가쁘게 달려오는 가운데에 왜곡된 사회 시스템을 재편하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혁신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돌봄의 문제, 국방의 문제, 교육의 문제, 주거의 문제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전환의 방향과 방식을 논의해 가면 좋겠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인구 규모와 구성 변화를 관측하고 관련 법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결국 인구 현상 변화의 실질적인 내용을 만들어 가는 것은 정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발전주의와 민주주의가 나름의 공생 관계를 맺었던 시기가 지난 오늘날 어떠한 사회경제적 체제를 상상해 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공허한 국가주의와 냉소적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 나름의 정치 공동체의 모습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서구 민주주의의 의미를 풍부하게 한 해석의 세 흐름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사회주의였다. 한국사회에서는 이 세 흐름의 가치가 제대로 논의되고 실천되지 못했다.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는 대개 반공주의와 동일시되면서 전체주의적 함의를 띄었다.
그 의미가 소유하고 소비할 자유로, 선택할 자유로 좁아져 버렸다. 한국사회에서 공동체는 곧 (특정 정권의) 국가와 같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사회주의적 비전은 해방 직후에 죽어버렸다. 이처럼 좁아진 비전의 지평에서 우리의 위기론은 사회를, 국가를 묻지 못하게 한다.
국가주의적 관점에서건 개인주의적 관점에서건 공유하는 인구위기론에서 시사하는 정치 공동체의 모습은 생존공동체 이상이 아닌 것 같다. 국가주의를 넘어선 공동체의 비전과 개인주의를 넘어선 자유주의의 비전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정치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쓴 국가 공동체의 의미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국가는 같은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단순한 공동체가 아니며, 상호 간에 부당 행위를 방지하고 교역을 촉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국가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 조건들이다. 그러나 그런 조건들이 다 충족된다 해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란 그 구성원의 가족들과 씨족들이 훌륭하게 살 수 있게 해주기 위한 공동체이며, 그 목적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삶이다. (...) 이런 것들은 우애의 산물이다.
함께 살겠다는 의지야말로 다름 아닌 우애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목적은 훌륭한 삶이며, 앞서 말한 것들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국가는 완전하고 자족적인 삶을 위한 씨족들과 마을들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완전하고 자족적인 삶이란 행복하고 훌륭하게 사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국가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은 모여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훌륭하게 활동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우리는 공동체 자체의 소멸을 말하기 전에, 어떤 공동체인가를 더 자주 말해야 한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오래된 의미와 새로운 의미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만들어 가야 한다.(출처 : 6월 13일자 국회미래연구원 '미래생각')
* 이상직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