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예수님이라면? 부처님이라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신앙인들이 하는 말이다. 절대자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갔을지를 생각하며 나름대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자문(自問)이다.
일은 시간이 지나면 형편에 맞게 해결되기 마련인데 신앙인은 어떤 결과가 나더라도 00님의 은혜, 00님의 가피라며 감사한다. 어려울수록 빛나고 절대자에 대한 의존도가 깊어지는 것이 신앙심이기에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혹평했다.
그동안 코로나 정국에서 종교는 어떤 능력을 발휘했는가? 종교 단체가 바이러스 전파의 진원지로 지탄받을 때에도 신앙인들은 오히려 초연했다. 일부 식자층이 코로나 영향으로 장차 종교는 쇠퇴하리라고 예견했으나 이는 로마의 핍박 속에서도 세계화를 이룬 신앙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예언이다. 팬데믹 시대에 사회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종교모임을 강행하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행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보다 더 현실적으로 ‘세종대왕이라면?’으로 자문해보면 어떨까. 전염병 극복에 대한 선대 왕들의 지혜를 배우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광해군 시대에는 온역(溫疫)이 퍼지자 『신찬벽온방』으로 전염병에 대한 지침을 내리고 환자를 상대할 때 반드시 등지게 하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제시했다. 선각자다운 혜안이었다.
17세기 소빙하기의 경신대기근(1670~1671)은 역병과 기근으로 인구의 1/5이 감소하는 피해를 입었다. 1750년(영조26년)에는 1월부터 9월까지 월말 통계로 집계한 사망자가 무려 22만 3578명에 달했고, 1786년(정조10년)에는 ‘호환마마’라 하는 두창(痘瘡)과 홍역이 창궐하여 새로 조성한 무덤이 무려 37만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가 하면 대동법 확대와 빈곤층 구제를 위하여 부유층의 세금을 증세하는 등 전염병 방지에 최선을 다했다. 그중 세종대왕이 단행한 전염병 대비책은 오늘날의 정국에 세계적인 전범(典範)이 될 만한 정책이다.
1432(세종14)년 4월에 전염병이 발발하자 세종은 토목 공사를 중지하고 구료(救療)에 힘쓰라 했고, 1434년에 또 다시 전염병이 창궐하자 세종은 친히 처방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배부했다. 1437년에는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한성부에 무료 급식소 진제장을 열어 천여 명씩 수용했다.
그런데 집단 수용으로 인해 전염병이 휩쓸어 사망자가 나타났다. 이를 교훈 삼아 1444년에는 ‘분산 수용’과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마라’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게 하고 관리(官吏)들에게는 철저히 구휼 활동을 펼치라고 지시했다.
종교인들의 신앙 행위는 사회에 정신적 활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는 세종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의 정책을 전범으로 활용한 필요가 있다. ‘메르스’와 ‘사스’를 경험하고도 ‘코로나 바이러스19’와 같은 위난을 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세종대왕의 지혜를 자문해야 하는 이유다. 종교가 사회에 안정을 주는 순기능이 많지만 코로나19 때와 같이 사회가 불안한 상황에서 더 큰 불안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정치적으로 양분된 민심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종교인들이 앞장서야 한다. 정치에 편승하여 종교를 정치판으로 오염시키는 행위는 국민을 적과 아군으로 가르는 가장 위험한 요소다. 요즈음의 종교는 가장 좋은 실천덕목을 가르치면서도 실상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졌다. 맹목적인 신념은 무지한 행동을 낳는다고 했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종교는 본질적인 기능을 발휘하여 밝은 내일을 위한 상보적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와 종교의 상보적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 강기옥 기자 (시인)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강기옥 문화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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