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그동안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 여유롭게 지내보려고 고향에 내려와 살고 있다. 그런데 원래 의도했던 것 보다 자신의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여 불만(?)이다. 뿌리치기 힘든 지인들의 요청으로 이런저런 봉사하는 일을 맡게 되기도 하고, 지역에 도움되는 일이라고 도와 달라고 해서 이런저런 번잡한 일들에 끌려들어 가기도 한다.
전임 지역거점대학교 총장이 대학과 지역의 발전을 도와 달라고 하여 카이스트에서 운영하던 지역혁신센터를 지역거점대학교로 이관하여 나름대로 돕고 있다. 마침 정부의 정책방향이 대학과 연구기관을 활용하는 지역혁신 업무를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 넘기는 쪽으로 가고 있는 전환기라서 지역에서 해야 할 새로운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역에서 올해 유치한 RIS (Regional Innovation System 지역혁신시스템) 사업과 글로컬대학30 사업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지역혁신 프로젝트들은 지방정부에도 지역대학에도 처음하는 일이라서 그런지 프로젝트들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하고 혼란스런 모습만 보이고 있다.
혁신 (innovation) 이란 연구개발 등 새로운 아이디어와 방법론을 토대로 한 변화를 뜻한다. 혁신이 일어나려면 혁신을 실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 최근 지역혁신사업을 수행하는 도, 시군, 대학본부, 참여교수, 참여기업, 그리고 이들의 협력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은 조직 등 여러기관의 실무자들이 모여 회의하는 어느 자리에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다.
참여 교수나 기업들이 예산이 왜 아직 오지 않느냐, 항목별 예산에 제한이 많아 사업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있는데 풀어줄 수 없느냐 등 질문을 하면, 각 기관별로 안 되는 이유들을 설명하는데, 그 기관들이 그동안 지켜오던 규정이나 관행을 그대로 따르면 참여교수, 참여기업들이 원래 하고자했던 사업을 수행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기간이 시작되었는데도 예산이 몇달씩 늦어지니 미리 수행해주면 나중에 처리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일을 시작한 교수나 기업들이 예산의 사후처리가 안된다는 말을 듣고 난감해 하는 모습도 있었다.
그러면 사업기간을 연장해 달라는 요청이 있자, 기관의 성과지표에 악영향을 주니 안된다고 지원기관들은 얘기했다. 지원기관 사이의 문제뿐만 아니라 각기관 내부에서도 힘드는 새로운 업무를 기피하는 부서간 책임 넘기기가 엿보이기도 했다.
마치 네거리에 차들이 엉켜 있는데 아무도 교통정리를 해주지 않아 한 발짝도 못 나가는 상황이 떠올랐다. 컨트롤타워가 없는 것이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일부 참여교수나 기업들이 벌써 사업을 포기했다고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실무적 혼란이 사업 자체의 성격을 변질시켜 혁신적인 연구개발자나 기업을 위한 혁신사업이 아니라 지역 민원사업이나 그동안 지방정부로부터 지원받는 노하우를 축적한 연구자나 기업들을 위한 보조사업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혼란은 실무자들의 책임이 아니다. 리더들의 책임이다. 지방자치단체와 대학의 리더들이 사업을 유치하고 이를 치적으로 내세우는 데 열정을 보이고 있으나, 정작 일이 제대로 되고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혁신사업을 위해서는 기존의 시스템으로는 안 되고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부족한 것 같다.
지역혁신사업은 낙후된 지역을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대망의 기회다. 지방정부와 대학 그리고 연구기관의 리더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문제해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어 시스템을 구축하는 책임을 맡겨야 한다.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문제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
* 채수찬 경제학자 • 카이스트 교수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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