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인공지능은 고도의 지능이 요구되는 머리쓰는 일을 사람 대신 컴퓨터가 할 수 있도록 하는 소프트웨어다. 역사적으로 보면 획기적인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흥분하기도 하지만 불안해하기도 한다.
새로운 기술이 사람의 본연의 역할을 뺏어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대부분의 경우 새로운 기술은 사람이 하는 일을 더 잘 할 수 있게 하여 삶을 풍요롭게 해왔다. 물론 예외는 있다.
무기의 발전은 싸우는 일을 더 잘 할 수 있게 했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삶은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컴퓨터는 사람이 하는 일 중 단순하지만 매우 큰 빈도로 반복되는 일을 대신한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전문가들이 하는 복잡한 사고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인공지능이 하는 일은 이전에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하던 일과 질적으로 다른가. 대답은 yes and no다. 질적으로 다른 것은 맞다. 이전에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던 고도의 판단을 내릴 수도 있고, 사람처럼 일에서 배워가면서 판단능력을 업그레이드하여 결국은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게임에서 사람을 능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인간이 현재 가진 뛰어난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인가. 진화과정에서 단순한 돌연변이가 오래고 오랜 시간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단순한 작업의 엄청난 반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복잡한 것은 단순한 것의 반복과 축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컴퓨터 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정보처리 용량이 인간의 뇌를 능가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기중기가 사람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 옮길 수 있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인간은 기중기보다 무거운 것을 들 수 없고 인공지능보다 정보를 더 빨리 더 많이 처리할 수 없다. 그러면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쉽지 않은 문제다. 필자는 경제학자이니 경제적가치 측면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경제활동에서 생성되는 '경제적가치'는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물리학의 '에너지' 개념처럼 어떤 단위를 정하여 수량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실체가 있다.
1719년에 발간된 대니얼 디포의 소설의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난파되어 28년간 무인도에서 홀로 살게 된다. 그에게 여러가지 사건이 일어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먹고 살기 위해 뭔가 생산하고 쉬기도 하는 하루를 보낸다. 하루 일정시간 노동하면서 생성되는 생산물이 그의 노동의 대가 곧 임금이다. 말하자면 그 임금으로 자신에게서 생산물을 구매하여 먹고 사는 것이다. 이 자급자족경제에서 생성되는 경제적가치는 노동의 가치이기도 하고 그 열매의 효용가치이기도 하다.
19세기 후반에 3부작 '자본론'을 저술한 칼 마르크스는 경제적가치는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해 생성된 것인데 지배자나 자본가들이 뺐어간다고 보았다.
마치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가 '물'이 모든 생명계의 원천이라고 보듯이 마르크스는 노동이 경제의 원천이라고 본다. 모든 경제적가치는 생산에 투입된 노동의 단위로 표시할 수 있으므로 자연스레 노동이 경제적가치의 척도가 된다.
1959년에 경제학자 제라르 드브루가 쓴 '가치론'은 신고전파경제학의 입장에서 시장경제의 수리적모델을 제시하였다. 경제에서 생산되고 거래되고 소비되는 상품들은 시장에서 형성된 상대가격을 적용하면 어느 상품을 기준으로 잡든간에 그 가치가 단일한 척도로 표시된다.
여기서 노동은 가치의 원천도 아니고 유일한 척도도 아니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고 보는 고전파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마르크스가 발전시킨 노동가치설은 경직되고 불완전한 내용이다.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 이론이라기보다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성립되는 결론을 침소봉대한 것으로 보인다. 무신론자이고 유물론자인 마르크스는 유태인이다. 유일신을 믿는 유태인들은 우상숭배를 가장 죄악시했다. 역설적이지만 마르크스는 어쩌면 인간에 가치를 두고 자본주의사회의 물신숭배를 우상숭배로 여겼을 지 모른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노동을 다른 상품과 같은 반열에 둘 수 없다. 어떤 특정한 사회구조 아래서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되는 가치가 사람들이 원하는 가치는 아니다. 사회구조를 바꾸면 수요와 공급도 바뀌고, 이에 따라 가치도 바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가치가 생성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을 신고전파경제학자들은 틀렸다고 했다.
물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한 탈레스를 근대과학자들이 틀렸다고 한 것처럼. 그런데 많은 근대과학이론들이 맞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현대과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탈레스의 관찰이 오히려 통찰력 있는 것으로 생각될 지 모른다.
로빈슨 크루소에게 물어보면 경제적가치는 노동과 그 열매의 효용가치라 할 것이다. 그가 사용한 도구들은 일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인공지능세상이 와도 경제적가치의 기준은 사람이다.
* 채 수 찬 경제학자 • 카이스트 교수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시사앤피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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