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유럽 문화의 원형은 그리스에 있다. 도시건축과 음악, 미술, 철학,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리스적이다. 이를 두고 문화계는 물론 일반인들도 ‘모방’이라고 빈축거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얼마나 원형에 충실했는가로 예술성을 논한다.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하더라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상례다. 그러다 보니 문화의 한 형태가 나타나면 이삼백 년을 유지했다. 그 영향으로 이제는 문화의 양상이 세계적으로 평준화를 이루어 어디에 가도 유럽풍의 건축과 문화와 예술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신대륙이라고 하는 남미와 북미에서도 유럽풍의 판박이 문화가 문화강국의 상징인 양 도심의 공간을 메우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유럽풍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문화가 있다. 민주주의다.
동양이 황제의 궁궐을 중심으로 도시를 건축하고 절대적 왕권을 휘두르던 시절 그리스에서는 민주주의 제도를 실행하고 있었다. 도심의 고지에 신전(神殿)을 중심으로 한 아크로폴리스를 세우고 그 아래에 아고라(agora)라는 광장을 열어 시민의 사교와 소통을 위한 문화의 공간으로 이용했다. 그렇게 열린 공간에서 민회(民會)를 통해 열린 정치를 했다. 시민의 뜻을 모아 정책에 반영하고 재판을 하는 정치와 소통의 기능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고라에서의 재판은 본인의 변명이나 변호인의 변론 없이 민의의 따라 결정하는 단심제였다는 데 있다. 군주의 결정에 따르는 동양보다는 훨씬 민주적이었지만 민중의 심리와 지도자의 의도가 반영된 여론몰이의 희생이 뒤따를 수도 있는 약점이 있어 불완전한 요소가 있었다.
그 재판의 한 형식으로 그리스에는 도편추방(陶片追放)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민주정신을 해하거나 참주(僭主)가 될 만한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 중 국가에 해를 끼칠 만한 인물의 이름을 도기(陶器)의 파편이나 조개껍질에 기록하여 6,000표 이상이 나오면 10년간 국외로 추방하는 재판이었다. 기원전 487년경에 처음 실시한 이 제도는 인민재판과 비슷한 방법이었지만 엄연히 민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점차 정적을 제거하는 방편으로 악용하였다. 그래서 권력층과 대립상태에 있는 지도자나 소신을 펴려는 정치인은 광장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광장공포증’이라는 ‘아고라포비아(Agoraphobia)’가 나타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스의 명예와 민주주의 정신을 지키려는 도편추방이 동양의 군주권처럼 변질되어 빛을 잃은 것이다.
광화문 앞의 세종로나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은 유럽의 광장문화와 비슷한 성격을 적용한 곳이다. 그곳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다양한 목소리의 집회도 그리스 아고라 문화의 재현 같아 일견 의미도 있고 일면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 많은 민중에게 도편추방의 재판을 적용하면 서울에 남아 있을 정치인은 몇 명이나 될까?
한국 사회가 서구적인 문물과 제도를 닮아가다 보니 이제는 사람이 사는 사회를 영과 육, 정신과 물질, 선과 악의 양대 축으로 가른 플라톤의 이원론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우군이 아니면 적군으로 양분된 이원론적 현상은 국가 발전을 위한 정쟁이 아니라 권력 쟁취를 위한 정쟁으로 상대방을 무참히 죽였던 조선 시대의 당쟁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한국인의 순수한 정감과 예(禮)를 존중하던 사회성이 소멸되고 자기 소신만을 중시하는 확신정치인으로 변질된 현실이 염려스럽다. 그래서 정치 얘기만 하면 말다툼이 일거나 멱살 잡는 일이 벌어지기 일쑤다. 그래서 정치는 가장 혐오하면서도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이다.
세상 돌아가는 상황이 ‘너희’와 ‘우리’로 양분되어 서로가 색깔이 다른 종족을 대하듯 하다 보니 문인들도 언어와 행동도 가끔 심각한 양분 현상을 보인다. 문학의 기능 중 어느 부분을 중시하느냐의 차이지만 예부터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은 사회에 얼마만큼의 목소리를 내느냐에 따라 경향을 달리했다. 그래도 점잖케 문학작품으로 그 주제 의식을 드러냈지만 요즈음에는 문인들의 모임이나 단톡방에서 주고받는 문자에까지 논쟁이 등장한다.
단톡에서 정치 성향을 띈 문자가 올라오면 ‘이곳에서만큼은 문학 이야기로 소통하자’고 견제하면 그것도 반대하는 의견이 보인다. TV나 신문에서 수없이 듣고 보는 정치 이야기를 문학인들의 자리에서까지 논하는 것은 자리를 깨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해결점도 없는 각자의 주장으로 분위기를 살벌하게 하는 일은 피했으면 좋겠다. 도편추방의 인민재판은 정치 이야기로 끝내야 한다. 신판 아고라의 문화의 변형으로 자리한 단톡방이나 소규모 모임이 문학의 정보를 교환하는 화기애애한 장소로 자리 잡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 강기옥 시인/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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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옥 문화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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