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앤피플] 사람이 모여 살면서부터 나타난 개인적인 활동은 사교(私交)다. 그것이 점차 사회적으로 영역을 넓혀 사교(社交)가 되었고 마을과 도시국가로 확대되면서 사교(私交)와 사교(社交)는 외교(外交)라는 용어로 굳어졌다. 보다 고차원적인 활동으로 사용하던 외교가 요즈음에는 다시 사적인 용어로 확장하여 나타났다. 사교활동, 사교댄스, 사교복 등 일상용어에 자주 등장하는 현실은 외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케 한다.
외교의 diplomacy는 로마시대에 ‘접어 포개다’는 그리스어 diplomas에서 유래하였는데 점차 얇은 금속판을 반으로 접은 통행권으로 발전했다. 그러던 것이 1645년부터 공문서를 뜻하는 의미로 확대되어 외교는 ‘공적인 문서’, 또는 ‘문서를 전달하는 자’라는 뜻을 내포했다. 그래서 외교는 사적인 관계에서 시작했으나 공적인 의미가 더 중하다. diplomacy는 국가 간의 이해관계에 의해 교섭하고 의견을 나누는 총체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사대교린(事大交隣)에 묶여 있어 격변하는 근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친러시아 정책을 폈으나 러시아는 조선을 등졌고, 수호통상조약을 맺어 찰떡같이 믿은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조선을 배신했다. 국력이 없는 외교는 거짓과 속임수로 철저히 농락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교의 실체다.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을 이루기까지 주변국에 펼친 외교는 권모술수였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앞두고 벌인 외교술이 모두 상대국을 외톨이로 만들기 위한 술수였다. 약소국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벌인 흥정이었지만 강대국으로 가기 위한 필수요건이었다. 명분과 의리를 존중한 조선으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술책이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명분과 의보다는 실리를 선택할 만큼 외교에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경제력이 커진 까닭이다. 전에는 오기와 배짱으로 강대국과 힘겨루기를 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국가의 위상에 맞는 힘이 실리는 정책을 편다.
강대국을 상대로 우리의 존재감을 지킨 것은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철수할 때의 일이다. ‘철수할 테면 철수하라’며 강하게 맞받아치자 카터는 선거 공약을 지킬 수밖에 없어 육군 일부를 철수한 대신 한국의 공군력을 증강시켰다. 근래에 보기 드문 자주 외교의 쾌거다.
이제는 누구나 외교관이 될 수 있는 민간외교의 시대다. 관 주도의 외교보다 민간외교가 더 활발해진 이즈음에 국가 중요 사안에 대해 경제와 국가의 자존감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의 선택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국익을 위해서는 통일된 의견을 모아주는 것도 필요하다. 베트남이 강대국과 맞서 일어설 수 있던 것도 국민의 결집 된 의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세계화 시대를 맞아 이제는 나라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어제의 적이 동지가 되고 필요하면 전쟁도 불사하는 신경제 식민시대가 되었다. 중국이 아프리카에서 펼치는 경제정책은 과거 강대국에 뜯기던 아픔을 상쇄하려는 듯 강한 흡입력을 보인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식민지를 확장 정책이다. 우리나라도 국익을 위해서 1992년에 자유중국과 국교를 단절한 일도 있지 않았는가. 외교는 전쟁이다. 아무리 덩치가 큰 상대라도 급소를 먼저 치면 승산이 있다. 냉정한 세계에서 우리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외교, 그래서 외교도 때와 사안이 중요하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우군도 없는 시대에 나라의 내일을 위한 냉철한 결단으로 나라의 내일을 위한 외교가 필요하다.
* 강기옥 시인/컬럼니스트(문화전문 기자) * 이 글은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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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옥 문화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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