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애피플]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로 인간의 속성을 제시한 『팡세』는 파스칼이 기독교 호교(護敎)를 위해 말년에 쓴 원고를 정리한 유작이다. 기독교 원리주의와 같은 얀센주의(쟝세니즘)을 신봉하면서 어거스틴의 예정설을 신봉했기에 『팡세』를 ‘미완의 성전’이라 하기도 한다.
19세에 나타난 컴퓨터는 파스칼이 만든 계산기가 원조인데 그것만으로도 파스칼의 명성은 충분히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1653년에 ‘밀폐된 용기에 담긴 유체에 가해진 압력은 유체의 모든 지점에 같은 크기로 전달된다’는 ‘파스칼의 원리’ 발견은 과학과 건축에도 적용되는 실용성 학문으로 파스칼은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밀리바(mb)로 사용하던 기압의 단위를 1992년 1월 1일부터 바꿔 사용하는 ‘헥토파스칼(hPa)’ 역시 파스칼의 이름에서 비롯된 용어다. 1971년 ‘국제도량형총회’에서 파스칼의 업적을 기려 압력의 단위로 사용하기로 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밀리바를 사용하고 있었다. 7080세대가 일기예보에서 자주 듣던 밀리바 그 단위다. 그래서 ‘헥토파스칼(hPa)’의 P는 반드시 대문자를 사용한다. 고유명사 파스칼의 첫자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자도 파스칼이 수학자, 물리학자, 신학자, 철학자임을 알고 있으나 실생활에 영향을 끼친 실학적 측면은 간과한다. ‘파스칼의 원리’는 철학적 사유의 용어가 아니라 도르래처럼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릴 수 있게 해준다는 실용적인 과학 원리다. 그런데 ‘생각하는 갈대’에 가려 철학자라는 편견에 치우쳐 생각한다.
1623년에 태어나 1662년에 죽었으니 파스칼은 조선이 호란(胡亂)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학문의 꽃을 피웠다. 그 화려한 업적보다 더 큰 의미를 주는 것은 민중을 사랑한 실용정신이다. 대중교통의 시초가 되는 마차를 파리 시내에 투입한 것이다. 여러 명이 함께 탈 수 있는 대중교통수단의 출발이다. 그 마차가 옴니버스(omnibus)인데 옴니를 생략하고 버스만 남아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버스가 되었다.
민중의 삶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생각하는 갈대’보다 더 크게 존중받아야 한다. 이는 "인간의 모든 고통은 혼자 조용히 집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는 명언과 상통하여 이 시대에 그의 존재감이 더 살아난다. 즉 혼자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에 교통수단도 발전시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발상이 파스칼적 삶의 철학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는 아테네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아니다. 세계의 시민이다.”라며 세계화 시대의 앞길을 닦아 놓았다. 세계화는 개방과 공유와 교류를 의미한다.
고시 공부한다며 절집을 찾던 시절은 지났다. 어울림의 시대다. 하물며 어울려 흥을 돋우고 어울려 판을 만들어야 하는 문화 예술은 어떤가. 조각보처럼 분화된 끼리끼리의 활동은 개선해야 한다. 문화 예술은 어느 집단보다 교류가 필요하다. 지식과 취미와 정보의 공유로 문화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독선적일 것처럼 보이는 파스칼의 버스가 위대하고 독배를 마시며 자신을 정당화한 소크라테스의 세계시민론이 위대해 보이는 이유다.
각종 예술 단체에서 국제적인 모임을 통하여 회원국 간의 교류를 꾀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더불어 국내에서도 세미나와 교류전을 개최하는 것도 문화의 질적 향상과 문화인의 저변확대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문화예술인의 활동은 자기 연찬으로 세계 평화를 이루어가는 기본요소다.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이 따라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존의 지원마저 끊어버리는 정책의 변환은 파스칼적 철학이 부족한 소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팬데믹의 위축된 상황을 극복하며 나름대로 행사를 진행해온 예술단체에 박수를 보낸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 작업에 몰두하는 문화예술인의 활동에 배전의 지원이 있기를 기원해본다.
* 강기옥 시인 (본사 문화전문 기자) * 이 기고는 <시사앤피플>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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